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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太白逸史)>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고구리국 본기(高句麗國 本紀) 제6 (1부)
1. 해모수(解慕漱 BC239~195)
고구리(高句麗)는 시조 단군 해모수(解慕漱)로부터 나왔다. 웅심산熊心山에서 부여의 옛 도읍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고 무리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BC239년(고열가 57) 4월 8일 부여(북부여)를 세운다.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시종하는 자들이 백여명이었다. 특별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나라 안이 저절로 잘 다스려져 산에는 도적이 없으며 들에는 벼와 곡식이 가득하니 나라에 큰일이 없고 백성百姓도 또한 근심이 없었다.
2. 1세 고주몽 성제(高朱蒙 聖帝 BC37~BC19) 년호: 평락平樂
해모수解慕漱 단군의 현손(북부여 6대 모수제慕漱帝의 막내아들)으로 60세의 모수제(慕漱帝 고무서高無胥 BC76~BC59, 생몰 BC118~BC59)가 16세의 유화(柳花 하백河伯 옥두진의 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고주몽高朱蒙이 동부여 금와왕(金蛙 BC62~BC7 생몰 BC90~BC7) 왕실에서 살다가, 왕자 대소(帶素 BC7~AD22)의 위협을 느끼고,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무리와 함께 탈출한다.
BC37년 졸본卒本에 자리잡고 북부여 7대 단군으로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고구리’로 바꾸고 ‘평락平樂’이라는 년호를 쓴다.
고주몽의 정치철학은 단군 이래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늘을 대신하여 사람 세상을 하늘마음(욕심을 제거한 본성)으로 이끌어야 한다. 본성을 되찾아 하느님과 하나 되면 뭇 창생들에게 참된 삶의 법을 제시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일을 완성한다.
사람이 욕심에 가려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하늘을 대신하지 못한다. 사람이 하늘을 대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을 없애야 한다. 늘 마음을 비워 고요한 상태로 유지하여 욕심이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계율을 지켜 이미 생겨난 욕심이 있어도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면 욕심이 영원히 사라진다.
욕심을 없앤 사람에게는 본심만 남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하며 대중들과도 언제나 한마음이 될 수 있다. 대중들과 한마음이 되어 일을 처리하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함일 뿐. 남의 나라를 침략하기 위함이 아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형을 집행하는 것은 죄악을 없애기 위함이지 사람을 해치기 위함이 아니다. 욕심이 사라져 마음이 고요해지면 하늘마음이 회복된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함일 뿐, 남의 나라를 침략하기 위함이 아니다. 욕심이 사라져 마음이 고요해지면 하늘마음이 회복된다.
주몽의 고구리군은 BC27년(평락11) 10월 북옥저(北沃沮)를 쳐서 멸했다. 대무신열제 20년(AD37년) 열제가 남서쪽 낙랑군을 습격하여 멸했다. 10세 산상제山上帝 원년(AD197년)에 아우 계수罽須를 보내 공손탁(公孫度 요동 태수)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토玄菟와 낙랑樂浪을 정벌하여 멸하며 요동(태행산맥 동쪽지역)이 완전히 평정된다.
3. 연타발(延陀勃 BC104~BC25) 처=류씨, 딸=관패·소서노(召西奴)
졸본 사람 연타발은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쌓았다.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닦고 도읍을 짓는 데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리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돈을 벌었고,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왕을 도운 공으로 '좌원'에 봉해졌고, 나이 80에 죽었다. 이때가 평락13년..
연타발-류씨의 딸이 소서노(召西奴 연타발의 딸, BC55~AD28).. BC42년 3월에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남쪽 패대 땅(진한과 번한의 사이 바다에 가까운 곳)에 장원을 두고 부를 쌓자,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 동쪽은 큰 바다에 임했는데, 주몽열제는 소서노에게 '어하라'라는 호를 내렸다.
4. 온조 백제
BC19년 주몽이 세상을 떠났다. 그 1년전에 이미 유리를 태자로 삼은 바, 비류와 온조는 땅(제후국)을 나눠 다스리게 했다.
海(당시 큰 강)를 건너 마한의 미추골에 비류가 자리잡고, 온조는 황하 이남(하남)까지 내려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랐다. 북으로 한수(황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海(동평호)로 막혀 있어, 도읍으로 했다.
5. 사로(=사로신라=진한)
사로의 첫 임금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황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으로 삼았다.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6. 6세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년호: 융무隆武
55년(융무3),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침공에 대비했다.
안시(安市), 건안, 석성, 건흥, 요동(遼東), 풍성, 한성, 옥전보, 택성(요택遼澤 서남쪽) 57년(융무5) 1월에 백암성과 통도성..
※<고구리사초략>에 따르면 55년(대무신28), 요서 10성은 개마(盖馬)·하성(河城)·구리(丘利)·고현(高顯)·남구(南口)·자몽(紫蒙=곤도昆都)·구려(句麗)·거란(車蘭)·하양(河陽)·서안평(西安平)
7.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
9대 고국천태왕(남무南武, 179~197) 때 을파소를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194년(고국천16) 진대법 실시..
을파소는 청년을 뽑아 선인도랑仙人徒郞으로 삼고 나라의 동량으로 길렀다. 훌륭한 사람이 정치를 담당하면 먼저 앞날을 이끌어갈 청년을 뽑아 교육시키는 것에 주력하여, 나라의 발전을 도모한다.
선인도랑 중 뛰어난 인물은 '참전(叅佺)'이 되었다. 참전(叅佺)으로 뽑힌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을 잘 지키며 신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서 누리 일들을 신에게 부탁하는 일을 담당했다. 선인도랑 중 무예를 담당하는 자가 '조의(皁衣)'이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이었다. 참전이 늘 하늘의 뜻에 따라 민중을 깨우치고, 조의가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였다.
을파소가 무리에게 말했다. "신시시대에 진리로 깨우치던 누리에서는 민중으로부터 진혜가 열려 나날이 최고의 나라에 이르렀으니, 만세에 걸쳐 바꿀 수 없는 잣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에게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하늘의 말을 듣고 대중을 깨우치는 것이고, 한맹(寒盟=동맹東盟=동명東明, 10월 제천행사)을 행함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해서 공을 행하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마음에 중심을 세우고 힘써 훗날에 이루어질 공에 대비하라"
이상정치가 실현되던 시대에는 민중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스스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므로, 언제나 홍익인간이 실현되었다. 그것은 진리로 이끄는 내용과 방법이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8. 19세 광개토경호태황(廣開土境好太皇)=영락대제(永樂大帝 재위 391~414) 년호: 영락永樂
훌륭한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모든 왕 가운데 뛰어나 사해四海 안의 모두가 '열제烈帝'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光明殿에서 등극했는데, 이때 의례로 천악天樂을 연주했다. 참성단塹城壇에 올라 친히 삼신께 제사를 올렸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매번 전투에 임할 때마다 군사들로 하여금 '어아가於阿歌'를 부르게 하여 사기를 북돋우었다.
황하와 양자강을 건너 왜인(지나대륙 남부)을 격파했다. 백제는 왜와 한통속이어서, 왜로 하여금 신라 남계를 연달아 치게 했다. 열제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熊津, 임천林川, 와산蛙山, 괴구槐口, 복사매伏斯買, 우술산雨述山, 진을례進乙禮, 노사지奴斯只 등 성을 공격하여 취했다. 천자국 고구를 향해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락駕洛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조공을 바치니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거란契丹, 평량平涼이 모두 평정되어 굴복하고 임나任那, 이伊, 왜倭의 무리들이 신하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해동海東의 융성隆盛이이 이때에 최고조에 달했다. 
※ 왜倭와 임나任那
일찌기 주몽의 측근 협보陜父가 수백여 호를 거느리고, 대륙남쪽 마한馬韓 산 속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여러해 흉년이 이어지자, 배편으로 패수를 따라 해포海浦를 거쳐 구야한국(狗邪韓國 가라해加羅海 북쪽 해안, 변진弁辰 구야국 사람들이 이룬 마을)에 닿았다. 몇 달뒤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긴다(다파라국 시조)! 다파라국은 훗날 임나任那에 병합된다. 3국=바다, 7국=육지..
다파라국(多婆羅 다라한국多羅韓國)은 홀본(忽本 졸본)에서 이주해온 바, 고구리와 일찍부터 혼인 관계를 맺었기에, 늘 고구리 열제가 반포한 제도 명령을 따랐다. 다라국은 안라국(安羅國)과 이웃하여 같은 성씨를 썼다. 
왜倭는 회계군會稽郡 동쪽 동야현東冶縣의 동쪽에 있었다. 배로 9천리 가면 나패那覇, 다시 천리를 가면 근도(根島 저도柢島).. 이 무렵 구노狗奴 사람과 여왕女王이 서로 분쟁을 일으키고 있어서 찾아가는 길을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진도津島→가라산加羅山→지가도志加島→말로호자末盧戶資→동쪽 경계가 구야한국狗邪韓國..
회계산은 본래 <신시중경神市中經>이 보관되어 있던 곳이다. 사공 우(司空 禹)가 석달간 재계하고 부루 태자를 알현하여 <신시중경神市中經>을 얻어 보고서야 치수에 공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禹가 돌을 캐어 부루 태자의 공덕을 새겨서 산 높은 곳에 세워놓았다. 오吳와 월越은 본래 '구리(九黎)'의 옛 읍이며 그 후손들이 나뉘어 산월山越과 좌월佐越을 이루었다. 상시로 왜(대륙남부)와 왕래,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점점 많아졌다.
진나라 때 서불(서시徐市)이 동야東冶 바닷가→나패→종도種島→뇌호 내해瀨戶內海→기이紀伊에 닿았다. 이세伊勢에는 옛날 서복徐福의 묘와 사당이 있었다.
9. 20세 장수홍제호태열황제(長壽弘濟好太烈皇帝)=건흥대제(建興大帝 재위 414~491) 년호: 건흥建興
인의로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니 웅진강熊津江 이북이 우리 고구리에 귀속되었다. 북연北燕, 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가 모두 형제 족속(叙族)으로 들어왔다. 신라 매금寐錦, 백제 어하라於瑕羅가 남평양에서 만나 공물을 바치는 일과 국경을 지키는 군사의 수를 약정했다. 
10. 21세 문자명성치호태황제(文咨明成治好太皇帝)=명치대제(明治大帝 491~519) 년호: 명치明治
501년(명치11) 백제가 다스리던 제濟, 노魯, 오吳, 월越 땅이 고구리에 속하게 되어 나라의 땅이 넓어졌다.
원래 백제는 제濟, 노魯, 오吳, 월越 땅을 평정한 후 관청官署을 두고 호적(民戶-籍)을 정리하였으며, 왕의 작위에 따라 봉토를 나눠주고, 험한 요새마다 군대를 두어 지켰다. 군역과 특산물의 부과는 내지(內地=백제)와 똑같이 하였다. 명치(문자왕 492~519) 무렵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권익의 집행이 모두 고구리 조정에 귀속되었다. 성과 읍의 경계를 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다.
501년(문자열제, 명치1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松江, 회계會稽, 오성吳城,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로 고쳤다
502년(명치12)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 취안저우)로 옮겨 채웠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군사를 보내 요서의 진과 평 2군郡을 취하고 백제의 군을 폐했다.
11. 25세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 559~590) 년호: 대덕大德
평강상호태열제(평원태왕)는 담력이 있고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를 잘하니 주몽의 기풍이 있었다. 다스림과 교화가 매우 밝았다.
576년(대덕18), 열제는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碣石山, 배찰산拜察山에 가서 토벌하고 유림관楡林關까지 따라가 북주北周를 대파하였다. 유림진楡林鎭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으니, 유림은 지금의 산서성 경계이다.
11. 26세 영양무원호태열제(嬰陽武元好太烈帝, 590~618) 년호: 홍무弘武
천하가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했다.
영양수원호태열제 때,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에 사변이 생기고,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민중의 생계에까지 피해가 미쳤다. 수隋 임금 양견楊堅(581~604), 양광楊廣(604~618)은 본디 선비족의 후손으로 상국을 업신여기며 대군을 자주 일으켰으나, 분노한 열제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 안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양견楊堅(581~604)은 속으로 모반의 뜻을 품고 원수를 갚겠다며 군대를 내었다. 몰래 위충韋沖을 총관總管으로 보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열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산동山東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성은 조용해졌다.
598년(홍무9), 열제는 서부대인 연태조(淵太祚 연개소문의 부친, 막리지)를 보내 등주登州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韋沖을 잡아 죽였다.
이 해에 양견楊堅(581~604)은 또 양량(楊諒 양견 4남), 왕세적王世績 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遼澤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癘疫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구周羅緱가 병력을 모아 등주登州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척을 징집시켜 동래東萊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리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미에서 후퇴를 막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이 되었다. 백제가 수나라에 군을 인도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고구리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614년(홍무 25), 양광楊廣(604~618)이 다시 동쪽으로 침략했다.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겹겹이 포위하니 관병이 이길 수 없었다. 양광이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는 것을 열제가 듣고는 적병의 진격을 늦추고자 곡사정을 보냈다. 조의선인 일인과 함께 그곳에 닿아 양광에게 표를 보내자 배 위에서 양광이 손에 표를 들고 읽었다. 채 반도 읽지 못했을 때 갑자기 소매속 작은 쇠뇌를 발사해 양광 가슴팍에 맞혔다. 양광이 놀라 실신하여 쓰러지자 우상 양명이 업게 하여 급히 작은 배로 옮겨 타 도망치고는 회원진으로 군사를 물리라고 명했다.
후세인들은 "미련둥이 한가漢家의 애들아, 요동을 향하여 개죽음의 노래를 부르지 마라. 유철(한무제), 양광(수양제), 이세민(당태종)도 바람결에 깜짝 놀라 망아지 뛰듯 도망쳤네."라고 노래를 불렀다.
12. 석다산石多山 사람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깨달음
일찌기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매년 3월16일(대영절大迎節) 마리산摩利山으로 가서 제물을 올려 경배하고 돌아왔고, 10월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제천은 곧 신시祭天의 옛 풍속이다.
을지문덕이 말하였다. "하늘마음(천신)과 한마음이 되는 게 길(道).. 하늘마음을 실천하는 능력(德)으로 민중과 나라를 지키라.
사람은 삼신三神의 힘알을 성명정性命精(3眞)으로 나눠받는데, 그때 저절로 들어와 있던 빛(광명)이 환히 빛나며 움직이지 않다가, 때가 되어 느낌이 생기고, 그 느낌이 밖으로 드러나면 그 느낌을 따르는 길이 열린다. 그렇게 되면 이를 실천할 세 능력 덕지체德智體(덕과 지혜와 힘)를 체득하여 실천함으로써, 삶을 이루는 세 집인 심기신心氣身(마음과 기운과 몸)을 만들고, 삶을 완성하는 세 방도인 3途 즉 느낌(感)과 숨(息)과 닿음(觸)을 기쁨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염표문念標文(11세 도해단군 선포)을 날마다 좇아 따르며 누리에서 참모습을 되찾도록 하며 3도 18경을 닦아 널리 사람누리를 유익하게 하는 데 있다.
※성명정性命精 : 性=온갖 것을 낳고 기르는 마음, 命=누리가 돌아가게 만드는 힘(힘알), 精=온갖 것의 몸을 만드는 재료(촘촘힘알).. 사람은 性을 받아 마음이 되고, 命을 받아 힘알(기운)을 가지며, 精을 받아 몸이 된다. 온갖 것을 파악하여 대응함에 있어서 세 가지 능력이 필요한데, 하늘마음을 느낄 수 있는 德, 느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智(지혜), 실지로 행동으로 옮기는 體(몸의 힘)..
사람의 삶 꼴은 두 가지로서 참된 사람이 되어 참되게 사는 것과 헛된 사람이 되어 헛되게 사는 것이다. 참된 삶은 착한 마음, 맑은 힘알(기운), 두터운 몸(精)으로 사는 행복한 삶이고, 헛된 살은 악한 마음, 흐린 힘알(기운), 엷은 몸으로 사는 것이다.
착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느낌을 잘 살펴 하늘마음과 하나가 되게 해야 하고, 맑은 힘알(기운)로 살기 위해서는 깊은 숨쉼으로 온몸의 힘알을 맑게 해야 하며, 몸을 두텁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과 닿을 때 다툼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이 세 가지를 기쁜 마음으로 완성하는 게 진리를 얻는 비법이다.
13. 612년(영양태왕23) 살수(薩水) 대첩
612년(홍무 23), 수나라 군 130여만이 수륙 양면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살수(薩水)에 이르러 적을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은 수륙 양군이 모두 궤멸하여,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700인이었다. 양광楊廣(604~618)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 영양제도 또한 엄명하여 이를 추격케 하였다. 문덕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적을 밀어붙여, 한 갈래는 현토 길玄菟道을 따라 태원太原까지 닿았고, 한 갈래는 낙랑 길樂浪道을 따라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그 주현州縣으로 들어가 다스리며 유민을 불러모아 편안케 했다.
여기에서 건안建安, 건창建昌, 백암白岩, 창려昌黎의 여러 진鎭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昌平, 탁성涿城, 신창新昌, 통도桶道의 여러 진은 '여기如祈'에 속하고, 고노孤怒, 평곡平谷, 조양造陽, 누성樓城, 사구을沙溝乙은 '상곡上谷'에 속하고 화룡和龍, 분주汾州, 환주桓州, 풍성豊城, 압록鴨綠은 '임황臨潢'에 속했다. 모두 옛 법에 따라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 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임신년(612년) '임신의 오랑캐(임신년의 침략자'가 전례없는 대군을 몰고 침략해 왔으나, 우리 조의(皁衣) 20만으로써 백만 적군을 모조리 멸해 물고기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대승을 이끈 을지문덕이야말로 만고에 시대의 흐름을 만드는 걸출한 영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