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대진국 발해) 2부

  • 등록 2025.12.22 22: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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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대진국=대진고리) 10대 대인수부터 15대 대인선까지

환단고기 대진국(大震國 本紀) 2부

 

7. 10대 성종 선황제(대인수, 818~832) 년호: 건흥建興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대조영)의 풍모를 지녔다. 남쪽으로는 신라를 정벌하여 니물泥勿, 철원鐵圓, 사불沙弗, 암연岩淵 등 7주州를 두고, 북은 염해鹽海, 나산羅珊, 갈사曷思, 조나藻那, 석혁錫赫 및 남북 우루虞婁를 공략하여 여러 부部를 두고, 장백산 동쪽을 안변安邊이라 하고, 압강 남쪽을 안원安遠이라 하고, 목단 동쪽을 철리鐵利라 하고, 흑수 위를 회원懷遠이라 하고, 난하의 동쪽을 장령長嶺, 장령의 동쪽을 동평東平이라 하였다. 우루虞婁는 북쪽 대개마의 남북에 있다.

 

 

 

※ 청나라 정사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남쪽(신라)과 북쪽으로 넓힌 땅에 용하, 회농, 길리, 삼로, 비류, 철리, 안정, 동산, 안녕 등의 군 등 군읍을 설치했다. 은주銀州는 부주富州로 바꾸고(월희 옛땅=회원부), 개주蓋州는 진주辰州로 바꾸었다.

​땅의 넓이 3600km(9천리)로 영토가 크게 개척되었으며, 문치文治의 태평성대가 이어져, 위로는 나라의 도읍으로부터 밑으로는 각 주와 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9서5계(九誓五戒)를 배워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철마다 관리의 능력을 평가하여 뭇사람이 의논하여 어진 이를 천거하므로, 사람들은 힘을 기른 뒤 집집마다 모두 나라에 쓰이기를 기다렸다. 이로부터 나라는 부유해지고 세력은 강해져,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 왜, 신라, 거란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에서 모두가 성인이 융성하게 다스리는 해동성국이라고 흠모하며 노래하였다.

​세우기가 무섭게 망해 나자빠진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5대(5대10국 907~960)를 지나며, 야율耶律은 빈번하게 몇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끝내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아들 신덕이 일찍 죽어서 손자 대이진(彝震)이 왕위에 올랐으니, 장종 화황제莊宗和皇帝(년호: 咸和)이다. 대이진 사후, 아우 대건황虔晃이 올랐다(순종 안황제順宗安皇帝 년호: 大定), 대건황 사우 명종 경황제明宗景皇帝 대현석玄錫(년호: 天福) 때, 해동에서 번성한 나라로 이름을 떨쳤다.

​애제哀帝 대인선諲譔(15세)에 이르러 멸망한다.

​926년(신시개천4823=단기3259). 세조世祖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 중화인민공화국 옛 지도에 발해를 북경(베이징)아래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현재 발해만도 보인다. ]

 

8. 15대 애제(대인선, 901~926) 청태淸泰

926년(청태26) 1월, 거란 야율배가 동생 요골은 특리곤, 아돈, 북부재상 소아고재 등 1만기를 선봉 삼아 승리한다. 그날 밤, 대원수 요고제, 남부재상 소, 북원의 액이기목, 살납제, 남원의 액이기목적리가 대진국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자 애제가 신료와 혈족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결국 15세 259년만에 망했다.

​방어선이 뚫려 무주공산이 된 발해의 북부 지역을 질주해 상경성을 포위하고 수십일만에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를 함락했다. 2월, 요(遼) 야율아보기(태조)가 발해국을 '동란국(東丹國)'으로 고쳐 부르고, 장자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았다. 왕은 년호를 '감로'라 하고 홀한성(忽汗城 부여성)을 천복성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천자의 관복에 준하여 12줄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랄(야율아보기의 동생 탑라 설 있음)=좌대상, 대진국 노재상(이름미상)=우대상, 대진국 사도 대소현=좌차상, 야율우지(야율이제)=우차상으로 삼았다. 나라 안의 사형수를 제외한 죄인들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단, 말 1천필을 할 것을 약속했다.

​망국 신세가 된 대진국 폐황제 대인선은 황도의 서성西域으로 보내며 이름을 '오이고烏爾古'로 고쳤다. 처는 '아륵찰'로 고쳤다. 부여부는 황룡부로 고치니, 대대로 요나라의 중요한 진鎮이 되었다.

​이 해 야율아보기(태조 907~926)가 죽자 야율배(耶律倍=돌욕=탁운, 인황왕)과 동생 야율덕광(耶律德光) 간 계승 분쟁이 벌어진다. 순흠황후가 장남 대신 동생 야율덕광을 동란국(東丹王)를 앉힌 탓이다. 이후 야율배는 후당(923~936)으로 도망갔고, 결국 암살당했다.

​952년(감로27) 12월, 요가 동경 중대성을 폐지하며 동란국(東丹王)도 없앴다.

​대진국(발해) 유민의 반란은 그 후로도 끊이지 않았는데, 946년 출제出帝, 986년 관해, 996년 아필, 1029년 대연림, 1115년 고유, 고영창 등이 반란.. 고영창은 이미 국력이 약해진 요遼 대신 금金이 쳐서 사로잡았다.

9. 대진국 도읍(5경)

목종穆宗은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했고, 의종毅宗은 '영덕永德', 강종康宗은 '주작朱雀', 철종哲宗은 '태시太始', 성종聖宗은 '건흥建興'이라 히고, 장종莊宗은 '함화咸和', 순종順宗은 '대정大定', 명종明宗은 '천복天福', 애제哀帝는 '청태淸泰'라 하였다.

​대진국의 도읍은 '상경(忽汗城)'으로 홀한하 동쪽에 있다(옛 숙신肅慎의 땅). 홀한해忽汗海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 서남 12km(30리)에 옛 숙신성肅慎城이 있다. 용천부라 부르며, 용龍·호湖·발渤 3주를 거느린다. 임황臨潢이라고도 하며, 훗날 요나라 상경 임황부가 된다.

​그 남쪽을 중경으로 삼아 현덕부라 부른다. 경慶·염鹽·목穆·하賀 4주 관할

동경은 용원부(책성부, 濊의 옛 땅)로 경慶·염鹽·목穆·하賀 4주 관할

서경은 압록부(고구리 옛 땅)로 신神·환桓·풍豊·정正 4주 관할

남경은 남해부(옥저 옛 땅)로 옥沃·청晴·초椒 3주 관할

 

※5경15부62주 : 용천/현덕/용원/압록/남해 5부 외에, 부여부(부여 옛땅), 정리부(읍루 옛 땅), 장령부, 막힐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까지 해서 15부.. 그 아래 60주는 용천3+현덕6+용원4+압록4+남해3+부여2+정리2+장령2+막힐2+안변2+솔빈3+동평5+철리6+월희9+안원4와독주주

3.. 출처: <흠정만주원류고>

 

10. 대진국에 대한 기록

 

​① <신당서新唐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된 나라로 성은 대씨大氏이다. 대중상(걸걸중상乞乞仲象)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리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옮겨가더니 요수(현 산서성 좌권현 근처)를 건너 태행산맥 자락 태백산의 동북부에 터를 잡고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했다. 대중상(걸걸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났다.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쳐, 땅이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일컬었다.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얻었다.

② 사씨史氏

​대중상(걸걸중상)은 패망하여 남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에 달려가 스스로 보전하였다. 고왕高王 조영祚榮이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길을 닦아 다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구천句賤이 월越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략 영토가 마련되자, 문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니, 제도를 고치며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설치하여 큰 나라에 맞섰다. 나라의 영역은 2천km(5천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러,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크게 성했던 나라이다.

11. 잡국들

① 대진국 황손 대연림大延琳이 세운 '흥요(興遼)'

​태조 고황제(대조영)의 7세손 대연림大延琳은 1029년(고리 현종20), 거란의 동경장군이었다. 부마인 유수留守 소효원蕭孝元과 남양南陽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戶部使 한소훈韓紹勳 등을 죽이고, '흥요(興遼)'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년호: 천경天慶). 고길덕高吉德을 당시 최대 패권국이던 고리에 보내, 나라를 세웠음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② 대진국 사람 고영창高永昌이 세운 '대발해국'

​요동유수遼東留守 소보선蕭保先은 정치를 혹독하게 했다. 1116년(고리 예종11), 동경의 비장이요, 대진국(발해) 사람인 고영창高永昌은 수십명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담장을 넘어 부위府衛에 들어갔다. 대청에 올라 유수留守(소보선)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왔으니 대비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보선이 나오자,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임시 유수假留守 대공정大公鼎과 부유수副留守 고청신高淸臣이 맞서 싸우다가 서쪽 문으로 달아나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高永昌은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년호를 '융기隆基'로 고쳐 대행산맥 동쪽(요동)의 50여 주를 거느렸다.

③ <송사宋史> '정안국(定安國)'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馬韓(타클라마칸+고창국+돈황)의 핏줄로, 요遼나라에 망하니 그 추장이 남은 무리를 모아 그 서쪽 변두리에 터를 잡아 나라를 세웠다. 년호를 정하고 나라 이름을 '정안국定安國'이라 했다. 970년, 정안국 왕 열만화烈萬華가 여진을 통해 송왕 조광윤(趙匡胤 960~976)과 교류를 튼 이래, 981년, 당시 정안국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을 통해 "내가 본래 고구리 옛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 이 한 모퉁이(마한땅)에 터를 잡고 있소"로 시작하는 편지를 당시 송왕이던 조경(趙炅 976~997)에게 보냈고, "그렇구려" 정도로 답하는 답장을 받았다.

 

 

 

 

④ 의려국(依慮國)

​정주正州는 의려국依慮國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鮮卑 모용외慕容廆에게 패하여 핍박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나의 혼이 아직 망하지 않았는데, 어디 간들 뭔들 못 이루랴?"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아들 부라(扶羅=의라依羅)에게 잽싸게 왕위를 넘기고, 수천명을 거느리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海口를 건너갔다.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고서, 자칭 삼신三神의 부명符命에 응했다고 여겨, 신하들로 하여금 축하 의례를 올리게 하였다.

⑤ 대륙남부 이국(伊國=이세伊勢)에 있던 잡국들(일본伊國, 왜倭, 안라安羅 등)

​축자筑紫에 자리한 이도국(伊都國=일향국日向國)의 동쪽은 왜倭, 남쪽은 안라安羅(본향: 忽本=卒本)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가, 대국 고구리와 일찍부터 혼인동맹을 맺으며 납작 엎드려 복속했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 대우국大隅國에는 시라군始羅郡(본향: 남옥저)이 있다.

​남만南蠻·침미忱彌·환하晥夏·비자발比自㶱 무리는 모두 대진국에 조공을 바쳤다. 남만南蠻은 구리(九黎 치우족)의 후손으로서 산월山越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발은 변진弁辰의 비사벌比斯伐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환하晥夏는 고구리의 사실상 노예종족屬奴..

​왜인倭人들은 산과 섬에 흩어져 살았는데, 각각 합쳐 100여 나라가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邪韓國이 가장 컸는데, 본래 구야狗邪의 본국(양자강이남 금관가야)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海의 배들은 모두가 종도種島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吳, 위魏, 만蠻, 월越의 무리들 모두 이곳을 드나들었다. 海를 건너 400km(1천리) 가면 대마국(對馬國 현 대만섬)에 이르는데 사방이 160km(400리)쯤 된다. 또 다시 海를 건너 400km(1천리) 가면 일기국(一歧國=사이기국斯爾歧國 사방 120km=300리).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海를 건너 400km(1천리) 가면 말로국(末盧國 본향: 읍루挹婁).. 동남쪽 육지로 200km(500리) 가면 이도국(伊都國 본향: 반여언盤余彦)..

 

 

글 :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고려사 복원 학회 이사  Chris

공저 : <책보고 99개 한국사 강의 요약서>

 

Chris Kim 기자 lodi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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