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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소서노(召西弩) 여제(女帝)와 온조(溫祚) 대왕(大王)의 사라진 13년의 이야기(6)

‘범골’ 지명에 관한 새로운 논쟁 ‘범굴’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의정부 경전철의 타고 가다보면 ‘범골역’이라는 역(驛) 명(名)이 나옵니다.

그래서 웬만한 분들은 아마도 이 동네가 왜? ‘범골’일까 하고 의문점도 가져보고, 인터넷도 뒤져보고 그러셨을 겁니다. 그랬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앞으로는 그러셔요. 흑.

이 ‘범골’이라는 지명유래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요. 그 중 범이 많이 출현하는 지역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說)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범골’의 위치가 옛날엔 ‘녹양평(綠楊坪)’ 안에 자리했기 때문인데요.

조선 시대 전부터 ‘녹양평(綠楊坪)’(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의하면 녹양평의 범위는 지금의 녹양동에서부터 다락원까지 ‘동서 7리, 남북 12리’라고 적혀있음.)은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어요. 그래서 말을 잡아먹으려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곤 했고, 조선시대 때에는 호랑이 사냥꾼으로 유명했던 세조(世祖)가 착호갑사(捉虎甲士: 호랑이 잡는 별동부대)를 앞세우고 여러 차례 다녀갔으며 마침내 호랑이 등살에 못 이겨 ‘녹양(綠楊)목장(牧場)’을 ‘살곶이 목장(箭串牧場: 살곶이 다리 건너 뚝섬.)’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록에 남을 정도였으니 왜 안 그렇겠어요.

그리고 덧붙여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당시 불교계를 주름잡던 무학대사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3년 간 이 범굴에서 수양전진(修養精進)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니 그 무게감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요.

 

그런데 제가 조사를 해보니 이 두 이야기 빼고는 모두 2,000년 전의 온조대왕의 온조국(溫祚國) 이야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수북이 남아 있더라는 말씀.

누구는 그럴 겁니다. 요즘 신동명 박사가 온조대왕 온조국(溫祚國) 때문에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범골’에 남아 있는 온조국(溫祚國)과 관련한 이야기는 총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범굴’ 관련 이야기를 진행해 볼게요.

‘범골’은 ‘범굴’(백인굴: 백 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동굴)과 가까운 동네라 그렇게 불렸다.

 

‘범골’이 ‘범굴’(백인굴, 박쥐굴)과 가까워서였군요.

그런데 우리가 이 글을 진행하면서 ‘범굴’(백인굴, 박쥐굴)에 대하여 한 번 짚고 넘어온 거 같은데? ‘범굴’(백인굴, 박쥐굴)은 뭐였습니까? 온조국(溫祚國)이 회룡분지를 하북위례성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로 소개되었던 그 굴 아닙니까!

궁금하신 분은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21 –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 편을 다시 한 번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구려에는 ‘국동대혈(國東大穴)’이 있습니다. 나라 동쪽에 거대한 동굴이라는 의미의 ‘국동대혈(國東大穴)’, 평소에는 고구려의 주몽, 유화부인이 하늘에 제사 지내지만 전쟁 시에는 은폐엄폐의 자연방어시설로 사용하여 백성들을 살리고, 군사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며, 전선을 가다듬은 뒤 다시 공격의 힘을 비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굴.

천손족(天孫族)이자 동명족(東明族)인 배달국 고조선의 자손들은 생명을 소중히 했기에 나라를 세우기 전 반드시 동굴의 유무(有無)와 그 크기에 유념(留念)했다고 누누이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온조대왕이 나라를 세울 때 제일 먼저 확인해야만 했던 자연방어공간 ‘범굴’.

그런데 동굴이라고 해서 다 합격점을 받는 게 아니에요. 퇴로가 확실한 동굴이어야만 합니다.

동굴인데 퇴로가 확실해야 한다고? 맞습니다. 위의 사진 보이시죠. 고구려 ‘국동대혈(國東大穴)’. 저 동굴도 앞뒤가 뚫려 있는 동굴입니다.

많은 사람이 피할 수 있는 동굴이지만 퇴로가 확실한 동굴만이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의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동굴로 점지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거.

그렇다면 ‘범굴’도 그럴까요? 네. 맞습니다. ‘범굴’도 입구가 두 개입니다.

위의 입구로 들어가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 끝에는 밑으로 내려가는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는 이중 통로 동굴 ‘범굴’.

그 통로의 끝은 호암사(乕巖寺) 경내로 이어지게 되어 있죠.

이 얼마나 멋진 동굴입니까!

이 대목에서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의 백성을 살리고 군사의 재기를 도모할 이 ‘범굴’을 발견하고 가시지 않는 미소를 만면에 지었을 온조대왕님의 얼굴이 그려지는 이유는 뭘까요?

‘범굴’을 통해 만나는 2,000년 전의 온조국(溫祚國)의 역사.

여러분은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렇듯 ‘범굴’이 2,000년 전 온조국(溫祚國)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면 ‘범골’ 지명 역시 2,000년 전 온조대왕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제 주장이 맞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