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이족인가,, 동이 민족인가? 동이족은 어디 살던 민족인지, 영토에 대해 설명을 들어본적이 있을까? 중국은 동서남북의 이민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불렀다. 동이는 삼국과 고려, 북적은 발해, 서이는 강족, 남만은 묘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이는 큰 활을 든 사람이라고 해석된다. 전세계 민족중 유일하게 공동체를 강조하는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 민족. 우리와 동이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는 오른쪽, 동은 오른쪽으로 같은 뜻이다. 1. 동이가 고려와 삼국이라고 ? 중국 당나라 역사서 <구당서>에는 동이민족을 5개로 규정하고 있다. 동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그리고 일본이다. 일본은 왜의 별도 종족으로 백제패망 후 새로 건국된 국가다. <구당서>에는 왜국의 설명과 일본의 설명이 별도로 달리 기술된다. 대한민국 보물 <고려사>에는 여러번 고려가 동이의 땅에 있으며, 동이민족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명나라 역시 고려를 동이로 호칭하고 있다. 산과 황하, 강 즉 해(海)가 있는 곳에 살던 동이 민족이다. 2. 현재 중국이 해석하는 동이의 중심지는 어디일까? 중국의 고대 하나라의 우공이 9주라 말한 동이지역부터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지난 2026년 1월24일(토) 1시부터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고려 역사 복원을 위한 학술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날 학술 토론회에 참석한 인원은 필자 포함한 학회 관계자와 시민 회원, 시민기자를 포함 약 50명.. 이 글은 필자가 여기에 참여한 소감을 여기에 적어보고자 한다. 토론회 초반에 제시된 협회와 학회가 목표로 정한 4가지는 첫 째로 고려사 국보 지정, 둘 째, 국명 변경(기존 Goguryeo에서 Korea로 통일하여 표기) 세번 째는 대형문고,시중 서점 판매에 판매하기 위한 협회원 학술지 출간, 배포 네번 째는 시민 한국사 교과서 만들기 등이었다. 위 4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 강령으로 혼용되고 있는 18가지 용어 통일과 일반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6가지 방법론, 저들의 질문 및 현 사학계가 반론하는 내용에 대한 반론 항목들에 대한 11가지 방법들 에 대해 논의하였고 지침을 세웠다. 사실, 필자가 가장 의심스러웠던 부분이며, 한국사 어느 시대가 가장 왜곡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니, 고려 역사를 제대로 복원한다면, 과거 단군 조선에서 삼국과 대륙 삼국설을 부정하는 자들을 설득하는 것 및 후
(최초) 발해의 5개 수도 위치. 감춰놨던 고구려 후손 발해(渤海國)는 당나라 기록에 진국(震國)으로도 기록이 되어있으며, 중국이 고구려와 더불어 중국의 역사로 편입한 대한민국의 역사다. <삼국사기>보다는 중국의 당나라 역사서, <구당서>, <신당서>,<송사> 에 자세하게 기록이 된다. (이미 2016년부터 중국은 거란, 발해, 고구려, 백제, 부여를 그들의 역사라 주장한다.) 698년부터 926년 까지 약 250여 년을 존속한 국가로, 중국의 왕조들이 300년을 못 넘기고 매번 멸망한 것과 비교하면 발해 역시 주변에 영향력이 컸던 국가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 후 뒤를 이었던 발해, 과연 그 중심지는 어디며, 어떤 기록으로 우리에게 기억될까? 옛 문헌 기록과 그 지명들을 한자를 지도로 찾아보면, 당연히 역사의 중심지는 쉽게 밝혀진다. 그간 이 쉬운 방법을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국역사학계에서는 도대체 왜 그간 중국 대륙에서는 우리 역사 지역을 검색 하지 않았을까? 왜 중국에서 주는 자료를 일방적으로 검토없이, 무지성으로 받아서 인용했을까? 이제 중국의 입장에서 입맛에 맞게 고쳐서 알려준 우리 역사 영토를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틀렸다. 신라 우산국은 울릉도가 아니다. 원서로 보는 위치. 한국사 수정 불가피 1. 문헌 사료에 기록된 신라 ‘우산(于山)국’ 사건 한국 고대사의 여러 쟁점 가운데, 신라 우산국(于山國)을 둘러싼 논의는 단순한 지명 비정(比定)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대사를 어떤 공간 인식 위에서 이해해 왔는가, 그리고 그 해석이 과연 세계사적·과학적·논리적 기준을 충족하는가를 묻는 문제다. 본 글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기록된 2개의 우산국 사건 ① 신라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512년)과 ② 고려 현종대 여진의 우산국 침입과 구휼(1018년)을 대상으로, *‘설명비용(explanatory cost)’이라는 논리학적 기준을 적용해 기존의 한반도 울릉도 중심 해석과 중국 대륙 중심 위치 해석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설명비용: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군더더기 논리 1) 사료가 말하는 신라 ‘우산국’ 사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산국은 명주(溟州) 동쪽 바다 가운데 섬이다. 산세가 험하여 복속하지 않았다. 신라 이사부 장군이 전함에 목각 사자를 싣고
고려 시대 존재하던 한글? 문헌 속 기록 훈민정음 창조 전에 존재하던 우리 글. 이 글은 세종대왕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다. 오해는 없으시길 바란다. 훈민정음의 체계는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언문(諺文, 암클, 여자글)이 고려시대에도 존재 했을것으로 보이는 기록을 살펴 보고자 한다. 세종대왕 시기에 언문(諺文) 또는 암클이라는 글이 있었다. 언문은 상놈의 글이란 뜻이며 암클이란 여자들이 사용한 글자라는 뜻이다. 당시 우리글을 비하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아래 기록을 보자. 1. 세종실록의 기록에 "형태는 옛 글자를 본 떠 만든 글자다." (형이자방고전. 形而字倣古篆)이라고 되어 있다. 2. 당시 집현전 학자이던 최만리(해동공자 최충의 12대손)의 상소문 기록을 보면 "옛 조정(前朝, 고려)에는 언문(諺文)이 있었고 ... 어찌 그대로 답습하며 따르기만 하겠는가? (借使諺文自前朝有之, ... 尙肯因循而襲之乎?)"라고 하며 "그 언문은 본래 옛 글자를 본뜬 것이다.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라고 한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
발해가 건국한 곳 영주(營州)는 어딘가? 대학 교수, 강사, 정부 역사 기관들에서는 어딘지 찾아볼 생각 자체가 없고, 그나마 일반인 재야사학, 민족사학자들은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수십년간 엉뚱한 이곳저곳 들쑤시는 중인 우리 역사 주요 지명, 영주(營州)! 중국 북조와 고구리와 고리의 강역으로 중요한 지명이다. 누구나 기록과 위성지도, 고지도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대한 국사편찬위 역주는 번역을 제대로 안 해 놓아서, 중간중간 잡서 인용과 잡소리 역주 빼고 제대로 번역, 요약해서 소개한다. 대륙 산서성 태원(太原) 연(燕)=기주冀州· 유주幽州· 영주營州(朝陽) 1. 연(燕)나라는 유주(幽州), 제나라는 영주(營州)로 부름 요서, 북평의 2군 포함한 지역. 북위때 영주(營州)는 용성으로 불러 다스린다. 북위의 영주(營州) 치소는 창려, 건덕, 요동, 낙랑, 기양, 영구.. 하·상시대 기주(冀州) 주나라 유주(幽州) 춘추전국시대 연(燕) 진시황과 한나라때 요서 연燕나라때 유주(幽州), 제齊나라때 영주(營州) 북위의 땅이고, 수나라의 땅 당나라때 모해의 땅(唐初爲韓唐莫奚所據), 안록산의 난 때 쫄보왕 이융기가 사천성으로
한국 고대사, 중세사 해석의 문제. 식민지 한국사 학계, 해석의 한계 '비정(比定)'을 걷어내자 대한민국 역사책인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의 국사편찬위 해석을 보면 온통 그 위치를 '추정한다'. '비정한다.' 등 모르겠다는 표현을 묘하게 적어 놓았다. 당연히 그 추측한 위치들을 현재 교과서, 박물관 등에서는 확정된 양, 진실인 양, 가르친다. 이제 그 엉터리 위치들에 대한 해석을 뜯어 고칠 때다. "고조선의 왕검성은 평양으로 비정된다." "패수는 청천강으로 비정된다." 이게 뭔 개소립니까 ? [국사편찬위 사이트. 고조선,삼국시대,고려 시대 현장의 위치를 모르겠다고 다양한 변명으로 적어놨다.] 1. 역사의 해석시 위치 '비정'은 책임 회피의 언어입니다. '비정(比定)'은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의 방법론을 들여오며 만든, 일본식 한자어(Hitei)입니다. 견주어(Compare) 정한다(Decide)는 뜻인데,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내 논리로 보니 대충 여기가 맞는 것 같으니 그리 알라는 식의 강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가 한반도 안에 억지로 우리 대륙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새롭게 다시 해석하는 광개토태왕 비문 1. 발견부터 의문 19대 광개토호태왕(391~414) 비석문은 1881년 회인지역에 사는 한족(漢族) 문사 왕언장(王彦莊)이 처음 발견.. (과연 그 큰 돌기둥 사면에 글씨가 써 있는 걸, 그제서야 처음 봤다는 걸 믿어야 하나? 그것도 만주지방에 밑받침과 지붕도 없는 채로인 것을??) 해독할 수 없어서 만주의 문우 장백산인 영희소봉(榮禧筱峰)에게 말하였다. 소봉도 처음에는 탁본을 해서 "위(魏)의 비문 아닐까?" 했다고 했다. 태왕의 석비에 고구리(高句麗)라는 글자가 없었던 탓이다. 영희소봉씨가 일본군에 접근한 이유와 조건 없이 해석문과 탁본을 건내 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의 의혹스런 행적 때문에 연구성과도 매도당한 입장이다. 2. 러일전쟁 때 탁본이 돌고, 1908년에야 조선인이 이 존재를 인지 1904년 러일전쟁이 있었고, 영희소봉은 회인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감 大原 소좌에게 비문 해독문(본래 글씨체를 한자로 옮긴 것)을 기증했다. 大原은 해독문을 일본 박물관에 보냈고, 大原보다 먼저 회인에 근무했던 佐川 소좌가 탁본문을 가지고 갔다. 1908년 한국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