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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환단고기 (대진국 발해) 1부

발해(대진국=대진고리) 1대 대조영부터 9대 대명충까지

환단고기 대진국(大震國 本紀) 1부

대진국(발해) 총 15대 259년(668~926)

세조 진국열황제震國烈皇帝(걸걸중상大乞乞仲象, 668~698) 년호: 중광(重光)

1대 태조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대조영大祚榮, 698~719) 년호: 천통(天統)

2대 광종 무황제武皇帝(대무예大武藝, 719~738) 년호: 인안(仁安)

3대 세종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대흠무大欽茂, 738~794) 년호: 대흥(大興)

4대 대원의大元義, 794 대흥(大興) 폐왕廢王, 흠무 사촌동생

5대 인종 성황제成皇帝(대화흥大華興/璵, 794~795) 년호: 중흥(中興) 흠무 손자

6대 목종 강황제康皇帝(대숭린大崇隣, 795~809) 년호: 정력(正歷) 흠무 2남

7대 의종 정황제定皇帝(대원유大元瑜, 809~812) 년호:영덕(永德) 숭린 아들

8대 강종 희황제僖皇帝(대원의大言義, 812~817) 년호: 주작(朱雀) 원유 동생

9대 철종 간황제簡皇帝(대명충大明忠, 817~818) 년호: 태시(太始) 원의 동생

10대 성종 선황제宣皇帝(대인수大仁秀, 818~832) 년호: 건흥(建興)

명충 삼촌뻘(4세조 야발이 조영의 아우)

11대 장종 장황제莊皇帝(대이진大彝震, 832~858) 년호: 함화(咸和) 인수 손자

12대 순종 안황제安皇帝(대건황大虔晃, 858~872) 년호:대정(大定) 이진 아우

13대 명종 경황제景皇帝(대현석大玄錫 혹은 元錫, 872~895) 년호: 천복(天福)

14대 대위해大瑋瑎, 895~907

15대 애제哀帝(대인선大諲譔, 907~926) 년호: 청태(淸泰)

 

 

1. 세조 진국열황제(대중상大仲象=걸걸중상, 668~698) 중광重光

668년(개화27) 9월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振國장군 대중상大仲象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開原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천명이었다. 이들이 동쪽으로 가, 동모산東麰山에 이르러 근거지로 삼고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지키면서 나라를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가깝고 먼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자가 많았다. 오직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699년(중광32) 죽는다.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를 진숙열황제振國烈皇帝라 했다.

​태자 조영祚榮은 부고를 전한 사자를 따라 영주營州 계성薊城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와서 제위에 올랐다.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종묘에 고하고 법도를 세워 당唐에 맞서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2. 1대 태조 성무고황제(대조영, 698~719) 년호: 천통天統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李盡榮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당나라 장군 이해고李楷固를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지키도록 두고, 유망민을 불러모아 위로하며 정착할 수 있게 두루 보호하니,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로워졌다. 국호를 '대진大震',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고구리의 옛 땅을 차지하니,땅은 2400km(6천리)가 개척되었다.

​돌궐에 사신을 보내 외교를 텄다. 내륙약소국 당唐 측천이 81세로 죽고 이현(李顯 중종)이 唐왕이 되자 706년 발해에 회유책을 쓰며 외교를 텄지만, 거란과 돌궐에 얻어터지느라 唐에서 사신을 더이상 보낼 수 없었다. 713년 당 이융기(李隆基)가 최흔을 보내면서 외교가 다시 시작됐다.

​719년(천통21) 봄 대안전에서 죽었고, 묘호를 '태조太祖',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 했다.

 

 

3. 2대 광종 무황제(대무예, 719~738) 년호: 인안仁安

태자 무예武藝가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烏珠牧의 동쪽 4km(10리)에 있는 임황수潢水가 국경이 되었다.

​726년 흑수말갈 사신이 당唐과의 교류를 하며 선을 넘자 흑수-당 군사동맹으로 대진국을 치려 하는 걸로 의심하여, 친동생 대문예와 외숙부 임아(임아상)으로 하여금 흑수를 치게 했다. 이때 대문예가 거듭 불가론을 내세우니, 화가 난 무예는 종형 대일하를 보내 문예를 대신하여 군사를 지휘하게 하고 문예를 불러들여 죽이고자 하였다. 문예는 군사를 버리고 샛길을 통해 당나라로 내뺐다. 이융기(李隆基 현종 712~756)는 매우 반기며 문예를 안서로 피신시키고는 "영남으로 유배를 보냈소" 거짓 편지를 보낸다. 무예는 "왜 속임수를 쓰니? 문예가 영남으로 가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전에 요청한 대로 죽이시라" 명하니, 이융기는 뜨끔해하며 그제서야 영남으로 유배를 보낸다. (훗날 황제 대무예는 배신자인 동생을 죽일 암살자를 당唐 동도로 보내 문예를 찔러 죽이게 했으나 실패)

​732년(인안14)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唐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고, 등래登萊(등주登州와 래주萊州)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당나라 왕 융기(李隆基 당현종)가 문예더러 유주幽州에서 맞서라 요청하기까지 했다.

​이듬해(733년) 수비군 장수 연충린淵忠麟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遼西의 대산帶山의 남쪽에서 크게 당唐군 대파! 융기는 벌벌 떨며 강대국 신라에 원군을 청하였고, 신라군이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泉井郡에 이르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마침 겨울이 되어 사람 키를 넘어가는 큰 눈이 내려 신라와 당의 군사 가운데 얼어죽는 이가 아주 많았다.

 

하서(河西 황하 서쪽) 니하泥河에 이르러 국계를 정했다. 해주 암연현(岩淵縣)은 동쪽으로 신라와 접했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조공을 바쳤고, 임진강 이북의 모든 성은 모조리 대진국에 귀속되었다.

이듬해(734년) 당-신라 연합군이 또 침입하였으나 패하고 물러났다.

​734년(인안16), 개마蓋馬·구다句茶·흑수黑水 등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되기를 청하며 공물을 바치며 항복해 오니, 이들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松漠 12성을 쌓고 또 요서遼西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京 60주州 1군郡 38현縣을 이루고, 너비가 3600km(9천리)에 달하는 강성한 나라로 우뚝 섰다. 해동성국!!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 신라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사람 셋이면 범 한마리도 물리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의 황제와 백성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大震六德之歌)'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736년(인안18) 3월 안민현安民縣에 감로甘露가 내렸다. 예관禮官은 축하 의례를 올릴 것을 청하자 이에 따랐다. 이달 16일 서압록하(옛 고리국稾離國 땅)의 강변에서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천신에 대해 제사를 올렸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

​737년(인안19) 황제가 죽으니, 묘호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라 했다. 태자 흠무欽武가 즉위했다.

4. 3대 세종 문황제(대흠무, 738~794) 년호: 대흥大興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東京龍原府로부터 120km(3백리) 떨어져 있는 흘한하 동쪽 상경의 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이듬해엔 태학太學을 세우고 <천부경>, <삼일신고>를 가르치며 환단의 옛 역사(桓檀古史)를 강의했다. 또 학자들에게 명하여 <국사國史>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무위武威는 여러 오랑캐를 복종케 했다. 태백의 현묘한 도道가 민중에 젖어들었고, 홍익인간의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주: 1949년 길림성 돈화현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비가 출토되었다. 그 비문 2행은 ‘대흥大興’으로 시작된다. 대흥大興을 연호로 적는 유일한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이다.

​744년 새해에 하조경이, 745년 새해에 오차지몽이 唐왕을 찾아가 만났고, 746년 대진국 왕자 대도리행(계루군왕), 뒤이어 왕자 의신도 唐왕을 찾아가 만날 정도로, 성가신 나라 당唐과 친하게 지내어 외교를 안정화시켰다.

​793년(대흥 57) 황제가 죽으니, 묘호를 '세종世宗', 시호를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라 하였다.

 

 

5. 이정기의 제濟나라

이정기李正己는 고구리 사람으로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758년(대흥22), 장수들은 군의 통수권자 이희일을 쫓고 이정기를 즉위시켰다. 치청(淄靑 산동반도)의 절도사 이정기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황제(대흠무)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돕게 했다. 765년 제濟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781년(대흥45) 이정기가 죽은 뒤 대를 이어 아들인 이납納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792년(대흥 56) 이납도 죽고 아들 이사고師古가 그 자리를 이었다. 훗날 대진국 목종 강황제 때인 806년(정력12), 이사고가 갑자기 죽었을 때 집안 사람들은 상發喪을 치루지 않고 은밀히密 사람을 보내 이복동생 이사도師道를 맞아들여 받들었다. 이사도는 당의 치청국 침략용 쌀창고를 불지르는 등 많은 활약을 했으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 제濟나라 765~819 (45년)

765~781 이정기(李正己)

781~793 이납(李納)

793~807 이사고(李師古)

807~819 이사도(李師道)

 

 

 

6. 4대 대원의(794) → 5대 인종 성황제(대화흥, 794~795) →

6대 목종 강황제(대숭린, 795~809) → 7대 의종 정황제(대원유, 809~812) →

8대 강종 희황제(대원의, 812~817) → 9대 철종 간황제(대명충, 817~818)

세종 문황제(대흠무)가 56년간의 찬란한 치세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을 때, 대흠무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은 탓에, 사람들은 대흠무의 친척동생 대원의元義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794년, 나라 사람들이 이를 폐하고 선제(대흠무)의 손자 화흥華興(璵 굉림의 아들)을 맞아 즉위시키고 연호를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이듬해에 삼촌(대숭린)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죽으니 묘호를 '인종仁宗', 시호를 '성황제成皇帝'라 하였다.

​황제(인종 성황제)의 삼촌인 대숭린崇璘이 즉위하니 '목종 강황제穆宗康皇帝(6세)'다. 대숭린이 죽고 아들 대원유元瑜가 즉위하니, 의종 정황제毅宗定皇帝(7세)! 얼마 못 가 죽으니 아우 대언의言義가 즉위한다(강종 희황제康宗僖皇帝 8세)., 그 뒤를 대언의의 아우 대명충明忠이 잇는다

(철종 간황제哲宗簡皇帝 9세).

​명충이 1년만에 죽고, 삼촌뻘인 대인수仁秀가 즉위하니,

대진국 중흥을 이룬 성종 선황제(聖宗宣皇帝 10세)!!

 

 

 

 

글 :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고려사 복원 학회 이사  Chris

공저 : <책보고 99개 한국사 강의 요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