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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마음이 강한 자가 세상을 정복한다.

대통령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유력 대선후보 캠프가 ‘몽골기병’의 기동성을 대선 본선의 전술로 내세우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여당과 선대위가 너무 무겁다”면서 몽골기병 조직을 예로 들었다.
반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캠프는 느려터지고 운전하겠다는 감투만 많다.

e뉴스와이드 김건화 기자 |

"몽골 제국 제 1대왕 칭기즈칸(成吉思汗 성길사한, Chingiz Khan) 리더십과 속도 전쟁"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는 징기스칸의 힘을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몽골비사>에는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 자랑스럽다. 콧대 높은 백인 유럽 역사를 바꿔놓은 인물이다. "나 자신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없다. 나 자신의 우월한 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 ‘오만과 지나친 사치’ 때문에 주변의 문명을 벌했다.”

그는 칸이 된 후에도 목동처럼 검소하게 살며 절제했다.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라면서 백성을 자식처럼 대접하려고 노력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출신에 관계없이 형제처럼 대했다.

겸손하게 남의 말을 들으며 절제하고 살았던 징기스칸, 그는 마음의 세계를 살면서 마음이 강해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으며,그래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

 

마음이 강한 자가 세상을 정복한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 이 세 사람이 정복한 땅보다 더 넓은 약 800만㎢를 차지했던 징기스칸. 그가 죽은 후에도 몽골 제국의 힘이 150년 이상 더 지속되었고, 전성기의 몽골 제국은 3000만㎢에 이르러 동으로는 고려에서부터 서로는 발칸 반도와 헝가리까지, 북으로는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부터, 남으로는 열대의 인도와 버어마와 베트남까지 몽골 전사들의 말발굽이 지축을 흔들었다. 몽골 제국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는 격변할 수밖에 없었으며, 세계의 판도가 바뀌었다. “우리는 1천 년 전 지구를 지배하는 두 문명은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뒤흔든 것이 완전히 새로운 제국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몽골 제국, 즉 징기스칸의 제국이었다.징기스칸의 제국은 13세기 말까지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팽창을 거듭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무역 지대를 만들어냈고, 동서양 문명의 연결을 강화했다. 이는 중세의 GATT 체제라 할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1995년 12월 31일. ‘지난 천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징기스칸을 선정하며) 몽골비사에는 징기스칸은 항상 겸손하라고 시키고, 호라즘의 멸망을 오만과 사치가 부른 신의 저주라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올려 말하지 않고, 자신의 승리를 신의 명령에 의한 행동으로 승화시켰다.

징기스칸은 외국인 특히 아랍인을 신용하지 않았다. 관리로 기용해도 낮은 자리에 한해서다. 아랍인들이 높은 자리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우구데이칸 부터다. 연대기 작가들은 몽골과 징기스칸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몽골이 야만적이고, 학살을 즐기는 군대였다는 것은 오리엔티즘의 산물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컸던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걸 지배했던 제국이었고, 세계에서 최초로 유라시아대륙에 한동안 평화와 대대적인 물류교류를 성공시켰던 나라였다.

선종페스트로 인한 대칸들의 연속적인 사망이 없었다면 정권은 안정되었을 것이고, 사회질서와 경제의 붕괴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몽골 제국 황제 칭기즈칸에게는 배울 점이 많다.

“현명한 세 사람이 동의하는 말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말을 다시 해도 괜찮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에 대해서 신임할 수 없다. 너 자신의 말과 다른 사람의 말을 현명한 사람들의 말과 비교해 보도록 하라. 만일 서로 일치한다면 말해도 좋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된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마치 잘 기른 송아지처럼 말없이 있어야 하고, 전투를 할 때는 마치 사냥터에서 먹이를 쫓는 굶주린 매처럼 앞장서야 한다.” -칭기스칸 

 

1162년 5월 31일, 몽골에서는 11월 4일 기념하고 있다. 성길사한(成吉思汗), 테무진(Temujin), 태조(太祖) 등으로 불려진다. 칭기스 칸이란 칭호는 1189년 몽골부족연합의 맹주로 추대되면서부터 사용되었다. 이름의 연원에 대한 세가지 설은 첫번째 고대 터키의 '텡기스(바다)'라는 방언 유래 설과 두번째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새가 '칭기스, 칭기스'하고 울었다 유래 설, 그리고 세번째 샤머니즘에서 '광명의 산'을 의미하는“Hajir Chingis Tengri"이름 설이다. 이중에 세 번 째 설이 보편화된 것이다.

 

1162년경 오늘날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처지였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부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 당한다.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다. 12세기 당시 초원 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징기스칸에게 배울 점은 허물을 덮는 사랑이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푸른 초원의 영웅 징기스칸, 그는 영웅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때까지 수많은 어려움의 난관을 넘어야 했다. 그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다.

 

어머니 허엘룬이 메르키트 족과 결혼하려는 순간 아버지 예수게이가 납치해서 그 사이에서 징기스칸이 탄생하였다. 사생아다. 이렇게 탄생한 테무진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9살때 잠깐 만났던 부르테를 청년이 돼 다시 만났다. 아무것도 없고 소속도 없는 빈털털이에, 게다가 좇기는 신세인 테무진을 믿고 함께 해준 부르테를 만나 사랑을 키우고 의지하면서 아름다운 사랑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때 갑작스럽게 아버지와 오랜 악연으로 메르키트 족의 침략으로 테무진은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다. 전리품으로 빼앗긴 아내는 상대 부족에게 장수의 아내로 넘어가 능욕을 당하고 임신까지 하는 신세가 됐다. 테무진은 부르테를 잊지 못하고 아내를 구하려고 아버지의 옛 동지였던 옹 칸과 의형제인 자모카의 도움을 받아 연합군을 어렵게 구성해 아내를 구하기 위해 그의 생애 첫 전쟁에 참여하였다.

 

셀렝게 강변의 메르키트족 영통를 행해 진격을 하였고 부르테를 찾으러 정신없이 찾아 다녀도 부르테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미 메르키트 족의 전사의 부인이 되어있는 부르테는 전쟁의 폐혜를 피하는 중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수레에 몸을 싣고 이동하던 부르테는 징기스칸이 자기를 목이터져라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부르테는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징기스칸에게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도 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은 말위에서 미친 사람처럼 사랑을 부르짖었고 위험을 무릎쓰고 그 사랑의 부름에 생명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두 사람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한 사람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찾아왔고 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에 응답하였다. 사랑은 허물을 보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내던진다. 사랑은 상대의 어떤 문제도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허물을 덮는다”는 말이 진리로 남는 것이다.

 

징기스칸은 훗날 아내 부르테가 전쟁으로 잡혀가 임신한 적군의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고 누구보다 더 커다란 사랑을 베풀었다. 물론 종종 괴로움도 그에게 따라왔겠지만 갈등이 그에게 커다란 문제는 되지못했다.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진실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의 첫 아들도 그에게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은 물론 보다듬어야 할 아이였다. 그의 아들 주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병약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통보받았을 때 그는 아들을 더 사랑으로 돌보지 못한 것을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린 사실을 보면 그는 위대한 아버지요 참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징기스칸을 대통령선거에서 벤치마킹한 후보가 정동영에 이어 이재명이 선택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군대를 소유할 수 있었던 몽골 기병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 전술의 전부는 기동성이다.

흔히 말하는 군사작전은 부분적 요소에 불과하다. 몽골인들은 마상(馬上) 전투술에 뛰어났지만 체계가 전혀 잡혀 있지 않아 대규모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칭기즈칸의 천재성은 이 질서없이 빠른 몽골 군사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고 규율과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적 군대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그는 ‘슬로 슬로 퀵 퀵(slow slow quick quick)’이라는 고대 중국의 전략을 채용해 군대를 변화시켰다.

 

첫 단계 ‘슬로’는 출정 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슬로’는 상대가 느슨해져서 자기만족에 취해 준비를 게을리 하게 만드는 단계다. 몽골군은 일부러 져주기도 해서 상대가 자만에 빠지게 했다. ‘퀵’의 첫 단계는 기습 공격을 통해 적군의 관심을 한 방향으로 쏠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퀵’은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더욱 신속하게 허를 찌르는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몽골군의 장점을 속도전이라지만 빠른 전술을 구사하려면 체계적이고 전략적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 준비된 상태에서의 속도는 강력한 공격수단이 될 뿐 아니라 우군에게도 긴장감을 주는 밴드왜건 효과(bandwagon)가 있다. 대통령 선거를 3개월 앞두고 유력 대선후보 캠프가 ‘몽골기병’의 기동성을 대선 본선의 전술로 내세우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여당과 선대위가 너무 무겁다”면서 몽골기병 조직을 예로 들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캠프는 느려터지고 운전하겠다는 감투만 많다.

 

슬로 슬로 퀵 퀵, 이재명과 윤석열 중 어느 쪽이 더 규율과 전략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대선 조직으로 채찍질하느냐가 대선 속도전 승리의 관건이다. 징기스칸의 리더십 첫째 징기스칸은 항상 장기적 관점에서 사고하고 민족과 나라의 비전을 고민했다. 그는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광활한 초원의 들판을 산책하며 낮엔 태양을 보고 밤에 별자릴 향해 “하늘이시여, 우리 몽골민족과 우리의 후예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먼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했다. 특히 몽골은 유목민족임으로 항상 환경에 맞게 옮겨 다니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환경 변화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몽골의 지도자는 이런 민족의 미래를 환경과 결부 지어 고민하고 준비했다. 둘째 그는 철저한 현장 중시 지도자였다. 징기스칸은 항상 전쟁 현장을 직접 누볐다. 전쟁 시에 앞장서서 전투를 진두 지휘하는 솔선수범을 보인 것이다. 그는 모든 문제는 현장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현장을 철저히 지켰다. 셋째 후계자를 양성하고 인재들을 키웠다. 징기스칸이 전쟁터를 누비면 본국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겨 미리 후계자를 양성하고 미래의 리더로 키웠다. 또 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위임했다. 넷째 징기스칸은 개방적인 사고와 포용력을 발휘했다. 그가 점령한 나라는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 언어 등을 인정하고 포용해 주었다.그리고 형제국으로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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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징기스칸이 나라 경영에서 가장 많이 역점을 둔 것은 화합과 협력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소통을 통해서 공동체 정신을 가장 많이 강조했다. 특히 많은 자식들 간에도 불화가 생기지 않도록 교육 시켰다. 하나의 화살은 누구나 부러뜨릴 수 있으나 열 개의 화살은 부러뜨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자식들 앞에서 실연을 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이복형제나 점령한 나라의 지도자들과 의형제를 맺은 자들이 배신을 해도 인내심을 발휘하며 3번까지는 절대 죽이지 않고 용서하며 설득하고 동참시켰다.

여섯째 몽골민족의 핵심 역량을 잘 활용했다. 몽골 유목민족은 기마민족으로 잘하는 것이 말 타기와 활 쏘는 것, 창 쓰는 것이다. 이러한 역량을 핵심으로 하여 전력을 강화한 것이다.

일곱째 징기스칸은 속도와 행동력으로 끊임없이 전쟁력을 배양했다. 몽골군대의 전투에서 강점은 말 타기를 이용한 속도전이다. 징기스칸은 병사들에게 두 필의 말을 지급했다. 한 마리가 지치면 다른 말로 갈아타고 또 지치면 다른 말로 갈아타면서 속도를 유지하도록 했다. 말이 병사들의 무게를 덜 느끼게 하기 위해 소가죽을 몇 겹으로 하여 만든 전투복을 지급했다. 이는 유럽의 병사들이 입는 철 갑옷의 무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벼웠다.

병사들에게 식량 보급은 소를 잡아 건조시켜서 잘게 빻은 가루 보르츠를 소나 양의 방광에 넣어 휴대하게 하고 더운 물에 조금씩 풀어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이를 통해 식사를 위한 야영시간을 최대한으로 축소했다. 그리고 중세 유럽의 병사들이 사용한 긴 창 대신에 날을 바깥으로 내고 휘어지게 한 낫 같은 칼로 말을 탄 채로 달리면서 베고 지나가도록 하여 속도를 높였다.

징기스칸은 병사들에게 “멈추면 죽는다”는 말로 배수진을 치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리도록 했다. 이러한 유목 기마민족의 핵심역량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미국 GE의 전 회장인 잭 웰치는 재임 시에 직원들에게 “몽골의 속도 전 배워라”라고 많이 강조했다. 징기스칸이 구사한 리더십은 지금도 유용한 것이며 속도 전(Speed)은 지금도 강력한 경쟁력의 한 포인트다. 전 세계 기업들은 전부 속도 경쟁이 한 창이다.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징기스칸을 두고 “800년 전에 21세기를 살다간 바람의 사나이”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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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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