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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일반

한국 현대시 400선 이해와 감상

(5) 불놀이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5. 불놀이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열정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

 

4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牡丹峰)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속에는 졸음 오는 ‘니즘’의 형상(形像)이 오락가락 ―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 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 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 없는* 장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부리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위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

 

* 매화포 : 종이로 만든 딱총, 불꽃놀이 기구.

* 간단(間斷) 없는 : 끊임없는.

 

(『창조』 창간호, 1919.2)

 

 

이 작품은 전대의 교훈성이나 계몽성을 탈피하고 개인적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 일체의 운율적 제약을 벗어나 감정의 자유로운 유출(流出)에 합당한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대담한 상징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한문투를 최대한 배제한 순우리말 표현 - ‘외로운 강물’, ‘스러져 가는 저녁놀’ 등은 당시로 보아 대단히 값진 성과라 할 수 있다.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자아는 죽음과 삶, 즉 임을 잃고 갖게 된 죽음에 대한 유혹과 사월 초파일의 흥겨운 불꽃놀이로 나타난 현실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죽음과 삶의 대립은 어둠과 밝음, 물과 불의 대립으로 이어져 전편을 격정적이고 불안한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다시 말해,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 ’라는 구절로 나타나는 죽음과 ‘아아, 좀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에 표출되는 삶의 욕구 사이에서 번민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물’과 ‘불’이라는 두 원형적(原型的) 상징은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 슬픔과 기쁨, 삶의 고뇌와 비상(飛翔) 등으로 표상되는 대립적 요소이다. 그러나 외견상 화합할 수 없어 보이는 이러한 대립은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이라는 구절에서 역설적 논리로써 통합됨으로써 극한적 자학 상태에 빠진 시적 자아를 극적으로 소생시켜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부활의 언덕을 향해 배를 저을 수 있는 생명의 원동력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오던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 물과 불이 결국 동일한 것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시적 자아는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며 더욱 강열한 삶의 욕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에서 보이는 파괴적 충동과 격렬한 도취의 행위는 아직도 절망적 태도와 비애의 감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된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격한 감정으로 표출됨으로써, 때로는 시상(詩想)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여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감정의 지나친 유출로 인한 감정의 허세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애상적 정조는 아마도 일제 치하를 살았던 청년 시인 주요한의 고뇌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감상적(感傷的), 영탄적 정조의 세기말적 징후는 서구 상징주의 문학의 유입과 함께 당시 젊은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로 대표되는 <백조> 동인의 경우 3・1 운동의 좌절로 인한 암담한 절망감과 결부되어 퇴폐적이고 애상적인 분위기는 더욱 증폭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