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1부
1. 고구리 검모잠(鉗牟岑)과 안승(安勝)
668년 고구리가 망한 후,
고구리 수임성(高句麗水臨城) 사람 대형(大兄) 모잠(牟岑=검모잠=겸모잠)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안승安勝을 받들어 후고구리왕(보덕왕 안승 669~671, 674~683)으로 삼고
신라에 원조를 청하였다.
신라왕은 나라의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했다가 뒤에 '보덕왕(報德王)'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김정명政明 681~692)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조카뻘인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면서 반란을 꾀하여 왕을 참칭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남은 무리들이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報德城)을 점거하고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나 신라에게 평정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겨 살게 했다.

2. 후고구리 궁예(弓裔)
후고구리, 태봉국의 왕 궁예(泰封國王弓裔)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平壤人)으로
본디 보덕왕 안승(報德王安勝)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 강(剛)은 역술인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弓氏)가 되었다.
발해 대진국 13대 명종 경황제(대현석大玄錫 872~895) 때인 878년(천복9) 5월 5일,
궁예弓裔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붕 위에는 흰빛이 있어서 긴 무지개 같았는데 위쪽으로 뻗어 하늘에 닿았다. 신라 일관(日官)이 이를 보고 머지 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은 꺼림칙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아기를 죽이게 했다. 그 어미는 진귀한 보물을 뇌물로 주며 애를 안고 도망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숨어 살며 고생하며 양육했다.
궁예는 나이 10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했다. 장성한 궁예는 제멋대로 거리낌이 없었고, 불가의 법식과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일에 담이 컸다.
일찌기 궁예가 바리때(鉢)를 들고 재齋를 드리러 가는데 까마귀가 상아로 만든 책갈피(籤)를 물고 가다가 바리때 안으로 떨어뜨렸다. 살펴본즉 '왕(王)'이라는 글자가 있기에,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고구리 안승安勝 때부터 왕을 모시는데 애써 힘썼으나, 신라는 이에 보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그 땅과 백성들을 뺏고 다만 왕의 누이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리(高句麗) 유민들은 이 때문에 세월이 갈수록 원망이 쌓였고 불만을 품고 있다가 변을 일으켰는데 번번히 패했었다.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이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복하고 쌓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궁예는 죽주의 도적(竹州賊)이었던 기훤箕萱에게 투항했는데,
기훤이 업신여겨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궁예는 울분을 터뜨리고 스스로 편치 못하더니, 몰래 기훤 휘하의 원회元會, 신훤申烜 등과 벗이 되어 북원의 도적(北原賊), 양길梁吉에게 투항했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맡겼다. 군사 100기를 나누어 주고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주와 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 아슬나(阿瑟那)를 공략하여 무리가 600이 되자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게 했다. 힘들거나 기쁜 모든 일들을 모두 사졸과 함께 하,고 뺏은 것을 사사로이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896년(천복27), 태수 왕륭王隆은 송악군(松岳郡)을 들어바쳐 궁예에게 귀순하며 그에게 설명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 숙신肅愼, 변한卞韓의 왕 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거점 삼고 나의 큰 아들 건建으로 하여금 당신을 주인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 말에 따랐다.

3. 후백제 견훤 vs 후고구리 궁예
이때 후백제 이훤(李萱 견훤)은
무진주(武珍州)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시작을 살펴보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그 뒤에 일어났으며, 변한(弁韓)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이어왔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켰다.
나는 비록 덕이 없지만 의자왕(義慈)의 분을 풀려고 한다." 하고 완산(完山)에 도읍하고 왕을 칭하며 국호를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후고구리 궁예弓裔도 역시 그 이듬해(901년)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리를 멸한 것은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다. 내 반드시 고구리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터이다." 라고 했다. 국호를 '후고구리(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남쪽으로 순행을 갔다가 흥주사(興州寺)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화상이 걸려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내리쳤다. 궁예는 신라 도읍을 멸망시키리라 부르짖으며 신라로부터 귀순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처하며 머리에 금색 두건(金幘)을 썼다. 또 스스로 경문 20권을 지었으며, 강설하기도 하였는데, 승려 석총釋聰은 말하기를 "모두 사설괴담으로 이를 들어 논할 가치도 없다" 하니 궁예가 듣고는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4. 왕건의 쿠데타
918년(천수1), 왕건은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여러 장군에게 추대되어 해뜰 무렵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했다. 사람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건이 마침내 의기(義旗)를 들었다” 하고 외치게 하였다. 이에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궁문에 이르니 먼저 와서 북치며 기다리는 사람이 만여 명이었다. 마침내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이때 후고구리 태봉 왕 궁예弓裔는 변란 소식을 듣고 평복으로 갈아 입고 궁문을 빠져 나가 도망치다가, 얼마 못 가서 부양(斧壤)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5. 고리(고려) 태조 신성황제(太祖神聖皇帝)
919년(天授2), 서울을 송악의 남쪽으로 정했다.
943년(천수 25), 태조 신성태왕(太祖神聖太王)이 훈요(訓要)를 지었다.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唐風)을 좋아하여 문물 예악에서 당나라의 제도를 본따 따라하곤 했다. 그러나 방위와 풍토가 다르고, 사람의 성품 또한 각각 다르니 구차하게 반드시 같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 고리高麗 국경은 <고리사高麗史> <송사> <고리도경> 등
각종 사서기록 모두에서 남북 1500리, 동서 2천리로 가로가 더 길었다.
서북은 고구리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고구리를 넘어섰다.
현재 베이징을 서경으로 삼고, 바로 옆 현 탕산이 주도인 개경,
그리고 왕건이 견훤과 자웅을 겨루던 주무대 양자강의 거점도시 양주를 남경으로 삼았다.
도읍을 아예 남경(양주)로 옮기면 36개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칠 것으로 기록된 것만큼
엄청난 영토를 거느린 대제국이었다.
한국사를 만든 일제강점기의 역사사기꾼 이케우치 히로시(+쓰다 소기치)가 한반도 안에 제멋대로 그어준 천리장성 경계에 언제까지 속은 채로 살 건지?
속인 일본조차 우리 '멍청함'에 도리어 놀라워한다는~
6. 고리 서희의 외교
993년 거란의 성종(契丹 聖宗 야율문수노 982~1031)이 장군 소손녕蕭遜寧을 보내
고리를 침략하여 봉산(蓬山)을 함락시키고 우리의 선봉을 물리쳤다.
고리 성종(成宗文懿大王 왕치王治, 981~997)이 군신을 모아 의논할 때, 어떤 이는 항복을, 어떤 이는 땅을 갈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였는데,
중군 서희徐熙만이 홀로 아뢰었다. “지금 적군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즉시 서경(현 베이징) 북쪽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리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요구해 온다면 그대로 다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만고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번 싸우게 한 뒤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고리 서희가 국서國書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들어가 성숙한 예로 대하니
거란 소손녕이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는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여야 한다.”하였다.
고리 서희는“양국의 대인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하니,
거란 소손녕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구리 땅은 우리 거란의 소유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를 침식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宋나라와 친교하기 때문에 오늘의 전쟁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朝聘)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고리 서희가 말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옛 고구리高句麗 땅이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고리高麗'라 하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東京용원부=책성부, 濊의 옛 땅)도 모두 우리의 땅이거늘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 옛 땅을 돌려준다면 마땅히 우리가 방문하지(수빙修聘) 않겠는가?”
서희의 말과 얼굴빛이 강개하므로 거란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병력을 거두기로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전송하였다.
※ 흥화-통주-구주-용주-철주-곽주 강동 6주는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얻어낸 압록강 동쪽의 영토
글 :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고려사 복원 학회. 이사 Chris Kim
공저 : <책보고 99개 한국사 강의 요약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