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7 (토)

  • 흐림동두천 -1.0℃
  • 맑음강릉 2.9℃
  • 구름많음서울 -0.3℃
  • 흐림대전 0.8℃
  • 구름많음대구 3.6℃
  • 맑음울산 3.0℃
  • 흐림광주 3.9℃
  • 맑음부산 3.8℃
  • 흐림고창 3.7℃
  • 구름많음제주 6.2℃
  • 맑음강화 0.4℃
  • 흐림보은 -0.3℃
  • 흐림금산 1.8℃
  • 맑음강진군 1.9℃
  • 구름조금경주시 1.1℃
  • 구름조금거제 2.9℃
기상청 제공

역사일반

환단고기 고려(高麗國 本紀) 2부

윤관(?~1111)부터 이존비(1233~1287), 이암(1297-1364)까지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2부

7. 고리 윤관의 동북9성

1107년(예종 2) 고리 도원수 윤관(尹瓘 ?~1111)을 원수(元帥),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만군이

여진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영주·웅주·복주·길주 등에 9성을 쌓았다.

두 장군이 선춘령(先春嶺=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윤언이尹彦灑를 임금에게 보내 표를 올려 하례하게 하였다.

 

8. 동북9성을 여진에게 돌려 줌

여진이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이렇게 아뢰었다.

“옛날 저희 태사(太師) 영가盈歌는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대국(고리高麗)에서 출생하였으니 자손 대에 이르러서도 마땅히 귀부함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국(고리高麗)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1104년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난리를 일으켰으나, 이는 본래 태사가 지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조(고리高麗)에서 죄를 물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저희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에 태사가 저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주실 것을 청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중서문하성 재신(宰臣, 2품↑), 중추원의 추신(樞臣, 2품↑), 어사대 대관(臺官), 중서문하성 성랑(省, 3품), 도첨의사사 지제고(知製誥), 시신(侍臣, 중추원 승선), 도병마 판관(都兵馬判官)과 문무백관 3품 이상을 소집하여 다시 동북 9성을 돌려주는 일에 대하여 가부를 물었다. 2명만 반대할 뿐, 28명이 돌려주는 데에 찬성했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용과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이 선정전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윤관과 오연총,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전쟁에 패하고 나라를 해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諫官) 김연金緣, 이재李載도 계속하여 탄핵하기를,“황제가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함인데, 이제 성을 다투며 싸워 사람을 죽였으니,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쉬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지금 돌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도 틈이 생길 것입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물었다.“무엇 때문인가?”하니,

김연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에 고하는 표문에, '여진의 궁한리(弓漢里)는 우리의 옛 땅이다. 그 거주민도 역시 우리의 백성인데, 근래 도적들이 변방을 끊임없이 침입하였기 때문에 다시 수복하여 성을 쌓는다' 고 하였습니다. 표문의 내용이 이러하나, 궁한리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많이 받은 자이니 거란은 우리 주장을 망언이라 책망할 것입니다. 이제 동쪽으로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으로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동북 9성이 우리 3한에 복이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라고 했다. 간의대부(諫議大夫) 김인존金仁存도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황제가 말한다. “두 원수(元帥)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제의 유지를 받고, 짐이 몸소 말한 일을 행한 것이다. 몸소 적의 칼끝과 화살을 무릅쓰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1000리 땅을 개척하고, 9주에 성을 쌓아 나라의 치욕을 씻었으니 그 공은 가히 크다.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그 변덕이 몹시 심하다. 그 남은 무리들이 기댈 데가 없으므로 추장이 항서를 바치고 화친을 청해오니, 신하들이 모두 좋다고 하지만 짐은 차마 참지 못하겠다. 담당관리(有司)가 법을 따져서 자못 탄핵하는 말이 많으므로 급히 그 직책을 박탈하나, 짐은 끝까지 이를 허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맹명시(孟明視)가 전쟁에 패해 황하를 건너 도망쳐 왔다가 다시 황하를 건너 적을 정벌했던 것처럼, 다시 돌아와 공을 세우기 바라노라.”

 

※ 孟明之復濟: 춘추(春秋) 시대에

진(秦)나라 장수 백리 맹명(孟明)이 처음에는 효함(殽函)에서 진(晋)나라의 습격을 당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본국(秦)에 돌아가서 3년 만에 황하(河水)를 건너 진(晋)나라를 쳐서 보복하였다는 고사를 이르는 말.

 

이 날의 회의는 종전과 같은 군신관계를 회복하고 9성의 땅을 반환해 주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거듭되는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은 고리도 여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국 9성을 설치한 지 1년 5개월 지난 1109년(예종4) 7월에 9성에서 철수하고 여진의 옛 땅을 돌려주었다.

​여진 정벌의 맹장 고리 윤관은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시킨 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입고 불명예 퇴진을 하였다. 예종(왕우王俁, 1105~1122)은 이듬해 오연총과 함께 윤관에게 복직시키겠다 하여 명예를 회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자존심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윤관은 복직 제의를 정중히 사양하였다. 예종은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파직한 것이니 내 마음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관직에 나오라.”고 달래었지만 윤관은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돌아가셨다.

 

9. 김부식(1075~1151)의 모함에 대한 윤언이의 해명글(自解表)

윤관의 아들 윤언이(尹彦灑 1090-1149)는 문무가 출중했다. 1133년(인종 11) 국자감에서 김부식의 '한역(桓易→周易)' 강의 때, 이미 易에 능통했던 윤언이는 핵심을 짚으며 묻고 따져 김부식을 쩔쩔 매게 했다.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 때 윤언이는 김부식 토벌대 막료로 참여해 공을 세웠다.

 

 

 

그런데 난이 진압되자 김부식은 윤언이를 묘청의 난 주동자로 서경(현 베이징)을

'천자의 땅'이라 주장했던 정지상(鄭知常 ?~1135)과 친하다는 이유로 한패로 몰아붙여 한직으로 몰아냈다.

둘다 칭제건원(元稱), 즉 고려 국왕을 황제로 격상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자고 주장했다는 걸 이유로 모함한 것이다. 윤언이, 정지상이 어릴 때 가까운 사이인 건 맞지만, 반란을 함께 할 정도 사이는 아니었다. 김부식은 자신에게 망신을 줬던 윤언이를 몰아내고 싶었던 거다.

양주방어사에서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좌천되자, 윤언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글(鄭知常)을 올렸다. “김부식(中軍)이 ‘윤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사당(死黨)을 만들고, 1132년(인종11)에 황제의 서경(현 북경) 행차 때 건원칭제(元稱)를 청했으며 국자감 학생들을 꾀어 앞의 일(건원칭제)을 아뢰케 해 금金나라를 격노시켜, 혼란한 틈을 타서 제멋대로 정적들을 없앤 후 외인과 붕당(朋黨)을 만들어 반역을 꾀하고자 한 것이니, 이는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더군요?

​신이 건원칭제(元稱)를 청한 것은 황제를 받드는 충정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본조(고리高麗)에도 태조와 광종의 옛 사례가 있고, 신라와 발해 역시 년호를 만들어 썼으나 주변 대국이 이를 문제삼아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작은 나라들은 감히 그 과실을 따져 의논조차 하지 않았죠.. 어찌 지금의 성세에 이것이 도리어 참람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요? 일찍 논의해 보자 한 게 죄라면 죄일까?

​사당(死黨)을 만들었다거나 대금(大金 금나라)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나라 같은 강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그 틈을 일을 처리한답디까? 대체 그 붕당(朋黨)이라 지목한 자는 누구이며, 제거하고자 한 자는 누구랍디까?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 둘 곳조차 없을 터인데, 어찌 방자한 뜻을 품어 그런 일을 꾀할까요? 신은 서경 정벌(西征)의 전역에 종사하여 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고, 이는 마땅한 도리입니다. 서경 정벌의 성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덕인데, 제가 무슨 힘을 충분히 보탰다고 말하겠습니까?"

​벼슬을 버린 윤언이는 고향 파평으로 돌아가 호를 '금강거사'로 자칭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여 관승 스님과 어울려 지내다가, 초막에서 좌선한 채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고리 김부식 포함 11명의 역사학자들이 이전의 역사를 모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기록.

현재 고리 시대 원본의 전질은 존재치 않고, 조선시대 개작본만 존재한다.]

 

 

10. 거란(요나라) 서계 내원성과 포주(來遠抱州)

『금사金史』 “1175년(金5대 세종15) 9월 고리高麗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이 서언 등을 보내 표문을 올려 자비령(慈悲嶺) 서쪽과 압록강(鴨綠江) 동쪽 땅을 가지고 귀부(內附)하려 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리사高麗史』 “1116년(예종 11), 3월 요遼나라의 내원(來遠)과 포주(抱州)의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고리 황제(睿宗)가 도병마록사 소억을 시켜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성(遼 통군)에서 받지 않았다. 8월,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遼 내원, 포주 두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자, 그곳 遼통군 야율령(統軍 耶律寧)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하였다.

​황제가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 한교여韓曒如를 파견하여 야율령耶律寧을 불러들이려(招諭) 했는데, 야율령은 황제의 전지(王旨)가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황제가 추밀원에 명하여 공문형식(箚子)을 갖추어 보내려 했는데, 재신과 간관이 의도를 알 수 없다며 뜯어말렸다. 황제는 이 기회에 이 땅을 다시 고리高麗 땅으로 수복하고자, 금나라에 “포주(抱州)는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니 돌려주세요” 청했는데, 이에 대해 금나라 임금(金主=태조 김아골타)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너희가 직접 빼았으라.”라 하였다.

11. 고리 후암 이존비(厚庵 李尊庇 1233~1287)

고리 충렬왕(高麗景孝王 왕거王昛, 1274~1308) 때

이존비李尊庇는 글의 경연(書筵)에서 자주부강 정책을 아뢰었다.

“우리나라는 환단桓檀, 조선朝鮮, 북부여北夫餘, 고구리高句麗 이래로 모두 부강하였고 자주를 유지하였습니다. 고리(高麗) 태조 때에도 년호를 정하고 황제라 칭했으나, 그런데 지금은 '사대'의 주장이 국시로 정해져 있어 군신 상하가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방법(自强)을 도모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나라를 보존하는 길일는지는 모르나, 천하 후세의 비웃음은 어찌할 것입니까?

​또한 왜倭(지나대륙 남부)와 원한을 쌓고 있으니

만약 원나라 왕실(元室 지나대륙 북부)에 변고가 생긴다면 장차 무었을 믿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황제라 칭하는 일을 이 시대에 꺼리고 기피하다가 갑자기 회복하기는 곤란하나 자강의 계책을 다루는 게 마땅합니다.” 상주를 멈추지 않으니 듣는 자마다 옳다고 여겼다.

고리 이존비는 왜倭를 대비하는 5가지 방안을 말했다.

① 호구를 상세히 파악하여 전 백성을 병사로 만들기 (詳備戶口 悉民爲兵)

② 병농(兵農) 일치의 제도를 만들고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키기 (兵農一作 水陸共守)

③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리하고 건조하기 (積置兵糧 修造戰艦)

④ 수군을 확장하며 육상전(陸操)도 함께 익히게 하기 (擴張水軍 兼習陸操)

⑤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민중이 화합(人和)하게 하기 (詳悉地理 確保人和)

일찍이 친구인 회당상인(晦堂上人)에게 준 시 한 수가 전한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서 다 쓰임이 있는데,

누가 오얏나무에 쓴 열매가 많다고 싫어하리오.

맏아들은 조정에서 천자를 오래 모셨고,

둘째는 새로이 절로 출가하였네.

세상 나가 충성함 신하된 본분이나, 그렇게 사랑 끊고

집 나서니 어이하리.

늙은이는 오히려 체념하고 웃지만,

때때로 꿈속 넋만이 먼 하늘을 맴도네.

 

物無美惡終歸用 苦李誰嫌着子多

長息久朝天子所 次兒新付法王家

移忠固是爲臣分 割愛其如出世何

還笑老翁猶滯念 有時魂夢杳天涯

 

12. 왕거(王昛 충렬왕)와 연녀(蓮女)의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

황제(충렬왕 왕거王昛 1274~1308)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에

연녀蓮女에게 푹 빠졌다.

헤어질 무렵 연녀가 손수 연꽃을 한 송이(蓮花一朶)를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황제가 돌아가시는 길에 만약 이 꽃이 시든 것을 보면, 이 목숨이 곧 다할 것입니다”

며칠 뒤 꽃을 보니 꽃이 시들어가는 걸 본 황제는 연녀가 죽을까 두려워 다시 연경으로 가려 했다.

이존비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고 자청하여 연녀를 찾아갔다.

 

​연녀(蓮女)가 울며 시를 바쳤다.

님과 내가 주고받은 연꽃 향기가,

처음에는 붉은빛으로 아리땁더니

꽃을 드린 지 며칠 지나니,

시든 모습이 님과 같아요

 

相贈蓮花香 初來綽約紅

移叢問幾日 憔悴與君同

이존비(尊庇)는 임금이 시를 보면 연녀를 더욱 그리워할 것을 염려하여

연녀 대신 시를 지어 바쳤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추지 마오, 수레를 멈추지 마오.

이 몸은 연잎에 맺힌 이슬 같으니

이 꽃잎 저 꽃잎에 구르는 것을..

 

這癡漢這癡漢 勿留輦勿留輦

此身便如蓮葉珠 彼邊轉處此邊圓

황제는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하였다.

그 뒤에도 황제가 연녀에 대한 원망을 그치지 않으시므로 이존비(尊庇)가 아뢰었다.

“신이 그때 모시고 돌아오기를 급히 서두르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 시를 지어 올렸습니다.

황제를 속인 죄에 벌을 내려 주십시오.” 황제가 화가 나서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문의(文義)에 유배시켰다.

​태자(충선왕)와 조정 대신들이 풀어주기를 여러 번 주청하였다.

황제 역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복직시켜 소환하셨으나, 사자가 이르기 전에 이존비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 황제는 부음을 전해 듣고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태자가 장례에 임하여 “이존비는 정직하여 나라의 사직(司直)을 맡았는데 어찌 이같이 요절한단 말인가?” 하니, 황제는 왕가의 예(王禮)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형강(荊江) 근처 산 4리를 둘러서 봉하니, 지금까지 동을 왕묘동(王墓)이라 부르고, 마을을 산사리(山四)라 부른다.

 

13. 시중 행촌 이암(杏村李侍中嵓 1297-1364)

이존비(厚庵 李尊庇 1233~1287)의 손자가

고리말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현 국무총리)을 역임한 이암(李嵓 1297-1364)으로

1363년에 47단군 실록 <단군세기(檀君世記)>를 지은 저자이다.

 

이암은 일찍이 권신의 무리가 국호를 폐하고 정동행성(行省)을 세우고자 하는 논의를 막기 위해

상소하였다. 상소문은 대략 이러하다.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삼고

제 풍속으로 민속을 삼으니, 나라의 경계를 깨뜨릴 수 없으며 민속 또한 뒤섞이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환단(桓檀) 시대 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분봉을 받은 제후(諸侯)와는 원래 근본이 같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의 굴레 밑에 있으나 그 원래 조상의 넋과 정신과 몸(魂精血肉)를 갖고 있습니다. 신시개천과 삼한관경(神市開天 三韓管境)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나라는 천하 만세(天下萬世)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명을 받은 태조(년호: 천수天授)는 창업의 자질을 갖추시고, 고구리 건국 이념인 다물(多勿) 정신을 이어받아 온누리를 평정하여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쳤습니다. 강한 이웃이 끼어들어 승세를 타고 횡포를 부려서 유주와 영주의 동쪽(幽營以東)이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황제와 신하가 밤낮으로 분발하여 자주와 부강의 계책을 도모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감히 오잠과 유청신(潛淸) 같은 간사한 무리가 제멋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국호(國號)를 어찌 폐할 수 있으며, 임금의 힘이 비록 약하나 위호(位號)를 어찌 낮출 수 있습니까? 이런 논의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가 죄를 감추고 도망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일 뿐, 결코 나라 사람들의 공식적인 논의는 아닙니다. 마땅히 도평의사사(都堂)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14. 행촌 시중(杏村侍中)의  이암의 저서 3권(杏村三書)

행촌선생(杏村先生)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서 유람하다 태소암(太素庵)에서 묵게 되었는데, 기이한 옛 책을 많이 가지고 있던 소전(素佺 도를 닦는 사람)을 만났다. 이명, 범장(李茗范樟)과 함께 신서(神書)를 얻었는데 모두 옛 한단(桓檀)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비결(眞訣)이었다.

​이암은 세속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옛 학문에 널리 밝아 칭송받을 만하였다. 그 참전의 계율을 닦는 법도(參佺修戒之法)는 이러하다.

​"3神 하늘마음(性본성)이 엉기어 지혜慧를 이루고, 3神 힘알(命)이 엉기어 덕德을 이루고, 3神 촘촘힘알(精)이 엉기어 힘力을 이룬다. 누리에 3神이 영원하매, 사람과 사물에 3眞(性命精)이 불멸하며(天下萬世), 뒤섞여 엉긴 하나體로부터 온갖것이 끝없이 생기고 바뀌어간다.

​길(道)이 하늘에 있으면 3神, 사람에 있으면 3眞(性命精)이다. '오직 하나'임이 길(道)이요, '둘로 나뉘지 않음(不二)'이 법(法)이다. 위대한 한웅(桓雄)이 하늘의 바탕인 길(道)을 깨우치고, 태백산에서 가르침을 세우니, 신시개천(神市開天)의 뜻을 누리에 크게 밝히는 시작이었다. 지금 우리는 글을 통해 길(道)을 찾고, 전(佺)에 참여해 계(戒)를 받는데도, 여전히 하나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처럼 늙어가니 한스럽도다!”

​헌효대왕(28세 충혜왕) 복위 5년(1344)에, 행촌 이암(杏村李嵓)은 어명을 받들어 참성단에서 천제를 드릴 때 백문보에게 이르길 “덕으로 신을 받드는 것은 오직 '믿음(信念)'에 있고, 영재를 길러 나라를 지키는 일은 '간절한 바람(發願)'을 이끌어내는 데에 달렸다. 신(하늘마음)과 사람(사람마음)이 서로 의지하여야 민중과 나라가 길이 편안하게 된다. 하늘에 제사드리는 정성은 결국 우리 뿌리에 고마움을 보이는 것이니, 그게 사람과 누리를 구하는 길이다. 그러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선생은 시중(侍中) 벼슬에서 물러나 강도(江都)의 홍행촌(紅杏村)에 들어가,

스스로 홍행촌의 늙은이(紅杏村叟)라 하며, 행촌 3서(杏村三書)를 썼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나라가 시작된 바탕의 체통을 밝혔고,

『태백진훈太白眞訓』은 한단(桓檀) 시대부터 전수되어 온 도학과 심법(道學心法)을 이어 받아 밝혔다.

​『농상집요農桑輯要』는 경제 실무(經世實務)에 관한 학문을 담은 것이다.

 

문정공 목은 이색(文靖公李牧隱穡)이 서문을 붙였다.

“무릇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고, 재물을 풍족하게 하며, 씨 뿌리고 모종하고 싹을 자라게 하는 방법을 분야별로 나누고 같은 것끼리 묶어 자세히 분석하고 촛불이 비추는 것처럼 또렷하게 기록하였다. 진실로 민중을 다스리고 기르는 데 좋은 책이다.”

 

 

글 :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고려사 복원 학회. 이사  Chris Kim

공저 : <책보고 99개 한국사 강의 요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