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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환단고기 고려(高麗國 本紀) 3부

공민왕(1351~1374)의 반원개혁부터 우왕(1374~1388)의 요동정벌까지

환단고기 고리국( 고려 高麗國 本紀) 3부

15. 고리 하동 河東사람. 정지상鄭之祥

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생몰 1330~1374)라는 이름으로 원나라 황실에 살던 시절의 공민왕

왕과 친분이 있었던 고리 사람 정지상鄭之祥..

그는 누이 일로 마실 나가듯 가까운 원황실(대도)에 왔다갔다 하다가

공민왕(왕전王顓, 1351~1374)과 친분을 쌓았고,

공민왕이 고리 궁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수행하게 된 것이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바로 뽑혀서 감찰지평(監察持平) 직을 맡았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임지에 가서, 세도가가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즉시 잡아다가 문초하고 모든 고을에 이를 알리니, 도道 사람들 간담이 서늘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는 본국(고리高麗) 사람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원15대 우카가투 칸(순제 1333~1370)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고, 동생 응여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세력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야사불화가 강향사(降香使)라는 직함을 받고 본국(고리)에 와서는 가는 곳마다 포악하게 굴었다. 이때 존무사(存撫使)와 안렴사(按廉使)가 많은 치욕을 당하고 욕을 먹었지만 감히 거슬러서 어길 수 없었다.

 

​전주(全州)에 이르자 정지상鄭之祥이 기다렸다가 공손하게 맞이하였으나, 불화不花는 매우 거만하게 대하였다. 반접사(伴接使) 홍원철洪元哲이 정지상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여 불화에게 “지상이 천자의 사신(天使)을 업신여긴다.”고 하자,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였다.

​지상之祥이 분노하여 협주의 관리(夾州吏)에게 큰 소리로 말하길 “나라에서는 이미 기씨(奇氏) 일당의 목을 모조리 베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야사불화 사신 일당 정도야 제압하기 쉽거늘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않는가? 장차 너희 주(州)가 강등되어 작은 현(縣)이 되는 꼴을 보려느냐?" 이에 읍리들이 소리치며 달려 들어와 결박을 풀고 꺼내주었다.

​정지상之祥은 마침내 무리들을 이끌고 야사불화不花와 홍원철元哲 일당을 사로잡아 가두고,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를 빼앗아 말을 달려 서울로 내달렸다. 공주(公州)를 지나다 응여(應呂 불화의 동생)를 따라잡아 철퇴로 치니 며칠 만에 죽었다.

​정지상之祥이 와서 왕께 이 사실을 고백하니 공민왕은 화들짝 놀라, 순군부(巡軍)에 명을 내려 하옥시키고, 행성원외랑(行省員外) 정휘鄭暉에게 명하여 전주목사(全州牧使) 최영기崔英起와 읍리(邑吏)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또 차포온車蒲溫을 보내 어주를 하사하여 불화不花를 위로하게 하고 금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보내와 정지상之祥을 국문케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1356년(공민왕5) 4월, 공민왕이 실제로 부원파 수괴 기奇씨네를 모두 죽이고, 정지상之祥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삼았다. 이후 호부시랑(戶部侍郞,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거쳐 판사(判事)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빈틈없이 엄격하여 모든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는 반드시 지상之祥을 보내 맡겼다.

​정지상鄭之祥의 아내는 홀로 담양(潭阳 현 복건성 장주漳州)에 살다가 왜구에게 해를 입어 죽었고, 아들 정종(鄭從)은 박위(朴葳 ?~1398)를 따라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였다.

 

 

16. 고리사람 기개를 보여준 문대(文大)

1230년(고종18), 서창현(瑞昌縣) 낭장(郞將) 문대文大가 몽고병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철산성(鐵山城)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안의 사람들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소리치라 시켰다.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몽고 사람이 그의 목을 베려 하다가 다시 한번 더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몹시 급하게 공격하니, 성에 양곡이 떨어져 마침내 지킬 수가 없었다. 곧 함락되려 하므로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은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 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모두 자결하였다.

 

17. 1363년(공민왕12), 참성단 천제

밀직사 이강(密直使 李岡)이 어명을 받들고 참성단(塹城壇)에서

천제를 올리고서 시를 지어 나무판에 새겼다.

​봄바람에 바깥 정취 짙어가는데, 왕명 받고 떠나온 길은 멀기도 하여라.

 

이른 새벽 궁을 떠나 말을 달리고,

저녁에 배를 타고 노 젓는데,

흰 갈매기가 파도를 일으키네.

하늘 향해 솟은 산은 푸른빛 뽐내고,

골짜기 봄기운은 절로 꽃을 피우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봉래산은 어드메뇨,

사람들은 이곳이 바로 선가仙家라 하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신선이 되려는가,

멀리 사람 사는 세상살이는 아득해 보이는구나.

변변찮은 제사상이나마 올리는 건 홍건적 물리친 뒤이지만,

돌로 쌓은 영기 서린 제단은 태고적 것이라네.

눈앞에 천리 강산 훤히 보이고,

몸은 구중 하늘에 오른 것 같아라.

이번 길에 부탁할 짝은 없지만,

적을 물리치고 환도한 첫해는 기억하자꾸나.

春風景物富年華 承命來遊道路賖

鞭馹朝辭丹鳳闕 棹舟暮癲白鷗波

半空蒼翠山浮色 滿壑蕩孟草自花

借問蓬萊何處是 人言此地卽仙家

心靜身閒骨欲仙 遙思人事正茫然

薦蘋秘席中興後 累石靈壇太古前

已得眼看千里地 況疑身在九重天

此行無凡如相托 須値還都第一年

 

 

18. 31대 공민왕(경효대왕 1351~1374)

1356년(공민왕5) 4월, 공민왕은 부원파를 이끄는 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盧頙 등이 반역 명목으로 잡아 처형시켰다. 최측근으로 반원 행적 탓에 어쩔 수 없이 하옥시켰던 정지상(鄭之祥, 河東사람)을 석방하여 순군제공(巡軍提控)을 삼았으며,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이문소(理問所)를 철폐하였다.

 

 

이때에 원나라 왕실이 극도로 쇠약해져

오나라 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이 강소(江蘇)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소란스러운 일이 많았다.

​최영 등이 고우(高郵)에서 돌아오자,

공민왕이 비로소 최영 건의를 받아들여 서북 땅을 되찾을 계책을 정했다.

먼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폐지하고 이어서 인당印琁,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

압록강 서쪽 8참(鴨綠江以西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柳仁雨,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 등을 보내어 쌍성(雙城) 등 옛 땅을 수복했다.

 

19. 홍건적의 침입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두적(紅頭賊) 반성潘誠, 사류沙劉, 주원장朱元 등 10만여 명의 무리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삭주(朔州)를 침범해왔다.

이듬해 이들 도적떼의 안주(安州) 습격 때, 상장군(上將軍) 이음李蔭, 조천주趙天柱가 죽었다.

​12월 공민왕이 복주(福州)에 이르러 정세운鄭世雲으로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으셨다.

정세운鄭世雲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공민왕의 파천 이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하게 여겼다.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황제도 또한 믿고 의지하셨다.

세운鄭世雲은 공민왕에게 "애통하게 여기는 조서를 속히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사신을 모든 도에 보내 징병을 독려하시라"고 여러 번 청원하였다.

공민왕이 마침내 조서를 내리니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李嵓이 정세운鄭世雲에게 전하여 말하였다.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에게 기울이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장수에게 기울이는 법이다. 나는 문신이라 나약하여 능히 군사를 부리지 못하니, 그대는 힘쓰시오.”

​정세운鄭世雲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분연히 소리 높여 유숙柳淑에게 군사 모집하는 일이 기한이 넘겼음을 나무랐다. 군대가 출발하려 할 때 이암李嵓이 세운鄭世雲에게 말했다. “지금 강력한 외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황성皇城을 지키지 못하고 황제(공민왕)의 수레가 파천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삼한의 치욕이오. 공이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어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리니,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한 판 싸움에 달려있소. 우리 황제와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바랄 뿐이오.” 이렇게 격려하여 전송한 뒤에 매일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독려하고 묘략을 내어 전해 주었다. 안우(安祐), 이순(李珣, 이암의 종질로 나중에 希泌로 개명), 한방신(韓方信) 등의 여러 장수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20. 북원 유익이 '명 vs 고리' 투항 저울질

1371년(공민왕 20) 2월, 여진 천호장 이두란李豆蘭, 첩목아帖木兒가

100호장 보개甫介를 보내 투항해 왔다.

북원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이

"요양(辽阳 현 산서성 좌권현)이 본래 고구리 땅이니, 고리(高麗)에 귀순하고자 합니다" 하며 귀화를 청해왔다. 이때 고리(高麗) 조정의 의견은 하나로 모이지 않아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공민왕은 정몽주鄭夢周를 명나라에 보내 "촉蜀을 평정한 것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신흥강국 명에 손을 내미는 외교 방향).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김의金義가 죽인 사건에 대해 조정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통에,

유익劉益 등의 귀부에 대해 바로 회신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유익劉益 등은 마침내 금주(金州), 복주(復州), 개평(蓋平), 해성(海城)와  요양(遼陽)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오호라! 당시 청론(淸論)을 떠드는 무기력한 자들이 한갓 닥친 일을 뭉그적거림으로 인해 좋은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리고 마침내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 하였으니 뜻 있는 사람의 한이 이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구나!

 

 

21. 1374년 32대 강릉왕(江陵王 우왕 1374~1388) 즉위

① 1379년 강릉왕(우왕 5년) 3월 참성단(塹城壇) 천제

사자를 보내 참성단(塹城壇)에 천제를 올리도록 명했다.

대제학(大提學) 권근權近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바쳤다.

아래는 서고문 내용이다.

 

​"첫 잔을 바칩니다(初獻).

바다 가운데에 산이 높으니

사람 세상의 성가심과 시끄러움에서는 멀고

제단 위는 하늘에 닿을 듯하니,

신선의 수레를 타고 내려오는 3신을 맞이합니다.

조촐한 음식이나마 여기에 펼쳐놓으니 밝으신

삼신이 와 있는 듯합니다.

初獻 海上山高 逈隔人豈之煩擾. 壇中天近 可邀仙馭之降臨. 薄奠斯陳 明神如在

 

​둘째 잔을 바칩니다(二獻).

3신께서 미혹됨 없이 들어서

이 사람에게 감싸안고 베풀어 주시죠.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누리를 덮고

아래로 사람 세상을 굽어보시죠.

예로써 하늘을 섬기니 3신께서 감응하여 모든 일이 통하기를 바랍니다.

마리산(摩利山)은 단군이 천제를 지내던 곳입니다.

성조(聖祖 태조 왕건 918~943) 이래로 민중을 위한 길의 잣대를 세우고,

옛 것을 잇게 하여 아름다움을 드리웠습니다.

 

​고종(왕철王㬚, 1213~1259) 대에 이르러

오랑캐(몽골)를 피해  도읍을 옮기고

또한 이곳에 의지하여 국본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국통이 끊어지지 않았고,

소자(우왕=왕우王禑, 1374~1388)가 이를 이어받아 더욱 받들어 섬깁니다.

하늘이여! 어찌 도적들의 도둑질을 외면하여 우리 민중을 어란(魚爛)의 지경에 이르게 하나요?

비록 변방이 침략을 받았으나, 이처럼 표문 올리는 것도 허락하시는데,

하물며 이 땅이 침략받는 것을

참고 보기만 하진 않으시겠죠?

밝은 위엄을 경험토록 하시겠지만,

제 덕의 모자람을 스스로 탓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그 하는 일(業)을 편안히 여기지 못한다면,

3신께서도 장차 돌아갈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옛 법을 좇아

감히 지금의 환란을 말씀드리오니,

조촐한 정성으로 올린 제사를

기꺼이 받으시고 밝게 굽어 살펴주세요.

바다에는 큰 파도가 일지 않게 하여 배들이 멀리서도 줄을 이어

드나드는 복을 누리게 해 주세요.

하늘이여!

명을 내리어 사직(社稷)이 반석 위에 서도록 보살펴 주세요.

 

二獻 神聽不惑 庇撚斯人. 天覆無私 照臨下土.

事之以禮 感而遂通. 竊念 摩利山 檀君攸祀. 自聖祖 爲民立極 彭纘舊而垂休芳

後王 避狄遷都 亦賴玆而保本故. 我家守之不墜 而朕小子 承之益虔. 天何外寇之狗偸 而以致我民之魚爛? 雖遠疆之受侮 尙許表聞 況厥邑之被侵 胡然忍視其明威之不驗 寔否德之無良 實難求他 惟在自責

天授紀元四百三十九年 敬孝王五年. 是歲夏四月丁酉 奇轍權謙盧頙等 謀叛伏誅. 釋鄭之祥 爲巡軍提控 罷征東行省理問所. 時 元室 極爲衰弊 吳王張士誠 起於江蘇 事多騷亂矣"

 

 

② 요동정벌 계획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승차(承差) 이사경 등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이고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본래 개원(開元)에 속하는 땅이니

거기서 관할하던 군인, 한인, 여진, 달달(타타르인), 고리인(高麗)은 여전히 요동에 속한다.” 운운하였다.

조정의 중론이 분분하여 하나로 모이지 않다가 마침내 싸울 것을 결정하고,

나라 안의 군사와 전마를 크게 일으키고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임명하였다.

 

 

※ 요동정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직전의 기록에서 환단고기의 고리국 기록은 막을 내린다. 

 

 

 

글 : 고려, 삼국 역사복원 협회,  고려사 복원 학회. 이사  Chris Kim

공저 : <책보고 99개 한국사 강의 요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