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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반

광개토태왕 비문 연구와 완역

신묘년기사, 경자년 임나(任那) 가라, 안라 기사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광개토태왕 비문 연구와 완역


1. 발견부터 의문

19대 광개토호태왕(391~414) 비석문은

1881년 회인지역에 사는 한족(漢族) 문사 왕언장(王彦莊)이 처음 발견..

(과연 그 큰 돌기둥 사면에 글씨가 써 있는 걸, 그제서야 처음 봤다는 걸 믿어야 하나?

그것도 만주지방에 밑받침과 지붕도 없는 채로인 것을??) ​해독할 수 없어서 만주의 문우 장백산인 영희소봉(榮禧筱峰)에게 말하였다. 소봉도 처음에는 탁본을 해서 "위(魏)의 비문 아닐까?" 했다고 했다.

태왕의 석비에 고구리(高句麗)라는 글자가 없었던 탓이다.
영희소봉씨가 일본군에 접근한 이유와 조건 없이 해석문과 탁본을 건내 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의 의혹스런 행적 때문에 연구성과도 매도당한 입장이다.


 

2. 러일전쟁 때 탁본이 돌고, 1908년에야 조선인이 이 존재를 인지

1904년 러일전쟁이 있었고,

영희소봉은 회인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감 大原 소좌에게

비문 해독문(본래 글씨체를 한자로 옮긴 것)을 기증했다.

大原은 해독문을 일본 박물관에 보냈고,

大原보다 먼저 회인에 근무했던 佐川 소좌가 탁본문을 가지고 갔다.
​1908년 한국인들의 유람차 일본 내왕 시작..

일본 박물관에서 비석문을 해독한 귀중본이라 하여 해석문과 함께 다량 인쇄 배포하는 것을 여행자들이 구입하여 우리나라는 비로소 비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3. 김택영, 정인보 해독문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 선생은

1904년 이미 만주를 방문하여 발해사와 태왕비문을 구해 와서 연구하였다고 한다.

김택영 선생의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에 기록된 태왕비문이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초기 미판독 또는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1930년 정인보(鄭寅普)선생의 해독문(조선문학원류고)에서도 탈자 부분이 너무 많고 특히 왜적(倭賊)기사가 많은 부분일수록 미판독이 많은 점은 누군가가 회칠을 해서 문질러 버렸다고도 본다.

4. 사문(詞文)과 한문(漢文)

광개토태왕비문은 문장이 비록 한문으로 쓰여 있으나

중국식 한문구조가 아니다.

비석문은 사문(詞文)이어서 한문식 해석으로는 완역할 수가 없다.

태왕의 비문에도 <사문(詞文)>으로 기록한다는 점을 표현하였으므로

우리조상의 글이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비문 스스로 알려주고 있다.
한문식 번역 vs 말씀식(詞文式) 번역.. 말씀식 한문은 신라에서 이두 표기식으로 발전했다.
​글자 하나에 하나의 음운으로 발음되는 점으로 볼 때 우리 동이민족의 조상이 만들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중국인은 한문글자 하나에 두 음절이상의 발음 또는 한 글자에 4성 발음이 있는 점으로 볼 때, 중국인의 조상이 한문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맞지 않다.)
​우리 조상들에게 한자는 말을 문장이나 문서로 써내는 도구적 수단! 말씀으로 표현된 옛글인 사문(詞文)을 썼고 이는 수천년이 지나도 후손들에게 사실이 객관적(客觀的)이고 명확하게 전달된다.
<신지비사(神誌秘詞)>가 우리조상의 오래된 고대의 기록이라고 하는데 원문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공자(孔子)의 출현으로 글은 시(詩), 서(書), 춘추(春秋)로 나뉘어 문장문화로 변형이 되어 관념적(觀念的)이거나 고사(古事)에 연관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됨으로서 표의문자(表意文字)가 갖는 본래의 뜻이 왜곡될 수 있다. ​​위에서 중국인 문사가 해독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한자인 줄 알고 접근했고, 해석하려 했으나 사문(詞文)을 몰랐기 때문에 해석을 못했다.
​또, 만주사람 영희소봉(榮禧筱峰)씨는 약간 해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만주지역에 아직 옛 우리조상의 사문(詞文)을 쓰고 있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영희소봉씨도 판독은 했으나 문맥을 완전히 알지 못한 것은 그 동안 단절(斷絶)되어 전하지 못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지 못해 사문식(詞文式) 문장을 완전하게 해석(解釋)하지 못한 탓이다. 사문은 한자(漢字)를 쓰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사실적(事實的) 어문이다. 한문을 전공한 사람도 이두가 가미된 글은 잘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태왕의 석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옛 조상의 정서가 있는 사문(詞文)을 먼저 공부해야 한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왕석비의 문맥(文脈)을 그들은 바르게 짚어낼 수가 없다.

​5. 신묘년(辛卯年) 사건의 엉터리 해석

일본에서 발간 배포된 비문은 엉터리 해석이 여러 곳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신묘년(辛卯年) 사건!
동북 아시아의 역사관을 일본 중심으로 관심을 갖게 시도했던 점과

비문의 실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왜(倭)가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엉터리 해석(解釋)으로 대륙침략(大陸侵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적에 이용하려 했다.
손자벌인 아베 총리가 그 시대에는 일본(日本)이라는 용어도 없던 시대

가짜 역사인 임나일본부를 조작해서 후손들에게 가짜를 교육하려 했었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連侵新羅以爲臣民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 래도해. 파백잔 연침신라이위신민" 

 

이 신묘년(辛卯年) 기사를 제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날부터 이곳(是)의 백성(屬民)을 다스렸다.

따라서(由) 조공을 받아왔는데,

왜倭는 391년(신묘년)부터 해마다 海를 건너와 백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태왕이 백제(백잔)를 파하니,

백제는 倭와 연합하여 新羅로 쳐들어가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했다."

 

6. 해양무역 요충지인 대륙남부(주강珠江 이남) 임나(任那)의 가라加羅, 안라安羅 관련 기사

 

"官軍方至 倭賊退 (官兵由新羅 躡踵追來奮疾 自倭)

背急追 至古龍加羅從拔城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관군방지 왜적퇴 (관병유신라 섭종추래분질 자왜)

배급추 지고룡가라종발성성즉귀복 안라인수병 발신라성 염성 왜구대궤"

 

400년(영락10) 태왕이 교서를 내려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러 가도록 명하였다.

남거성(男居城)부터 신라성(新羅城)까지 왜倭가 가득 차 있어,

태왕의 군사(官兵)들이 여러 방면으로 들어와 가운데로 들어가니(至) 왜적이 겁을 먹고 물러갔다.

신라군이 뒤를 밟아서 샅샅이 찾아서 잡아오고(躡踵追來) 왜의 뒤를 급히 쫓기 시작해서

임나(任那/古龍?)에 도착했다.

가라(加羅)도 고구리군의 뒤를 따르며(從) 공격했고, 성을 모두 빼앗았다(拔城).

다시 찾은 성(城卽)은 안라사람(安羅人)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戍兵), 신라성(新羅城)과 염성(鹽城)을 공격하니, 왜구는 크게 궤멸됐다.

 

 

7. 광개토호태왕릉 석비(石碑) 전문(全文)과 해석(解釋)

1) 아주 옛날부터 선조들이 비롯한 이 곳(之)에 추모제(鄒牟帝=漱皇)는

나라의 기틀을 만들고 건국하였다. 추모제의 아버지는 북부여北夫餘 마지막 천제天帝인 모수제(慕漱帝 BC76~BC59), 어머니는 서하를 다스리는 하백(河伯 옥두진)의 딸인 유화(옥유화 BC74~BC24).. 알을 스스로 깨고 세상에 나와 성인의 덕망을 갖춘 추모..

 


어미의 명을 받들어 자기 삶에 주어진 숙명(멍에駕)를 받아들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남쪽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북부여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만나니(由) 왕은 나루로 가서 말하기를 “나는 북부여 천제(皇天 수황漱皇=모수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 옥두진)의 여식 유화이다. 내가 바로 추모다. 나를 위하려거든 갈대를 잇고 거북배들을 이어붙여 내 뜻에 답하여 다오.” 하였다. 강을 건너도록 도움을 받아(造渡) 비류 골짜기(沸流谷) 홀본(忽本)에서 터를 닦고(於) 서쪽 산상에 성을 쌓아 도읍을 세우게 되었다.

​마침내(焉) 세상일이 즐겁지 않게 되자, 하늘에서 황룡(黃龍)을 보냈고, 엎드리며 제帝를 영접했다. 제帝는 홀본 동편에서 반짝이는 북두성(罡)처럼 빛났다. 세자(世子 유리類利)에게 뒷일을 당부해 맡기고(顧命) 용 머리를 밟으며(履龍首) 하늘로 올랐다.

2대 유류왕(儒留明孝文太皇帝 BC19-AD28)은 나라를 흥하도록 다스렸고,

3대 대주류왕(朱留天孝明世太皇帝 28~64)은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紹承基業)

이를 17세손(孫子代)에 이른 것이(遝)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호태왕 391~414)이다.

※3대 대주류왕(大朱留王=大武神王)으로부터 19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까지 17세손임을 이름..

2) 나라를 굳건히 한 위에(國岡上) 땅을 크게 넓혀(廣開土境) 나라를 평안하게 한 큰 임금, 광개토호태왕(平安 好太王)은 18세에 왕위에 올랐고(二九登祚) 년호는 영락(永樂)이다. 태왕의 은덕은 하늘이 다스리듯 두루 폈다. 위엄과 용맹함은 사해四海에 널리 떨쳤으며 구이(九夷)를 평정함으로써 무리들이 평안하였다. 물려받은 업을 잘 펼쳐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몰리고 오곡은 풍성하게 익어가, 하늘처럼 그 은혜가 끝없이 넓더라. 태왕의 운명이 길지 못하여(不弔) 수명이 39세(374~414)에 불과하니 하늘이 보낸 천자의 수레(駕)를 천천히(晏) 타며, 나라를 버리고(棄國) 편히 가셨으니 이날이 414년(갑인년) 9월 29일이다. 445년(乙酉年)에 산의 언덕山陵으로 옮겨왔고(遷就) 이곳에 碑를 세웠는데 태왕의 훈적을 기록하여 새겨 이것을 후세에 영원히 전한다.

3) 395년(영락5), 태왕은 (옛 조선의 속민이 아니어서 조공거래 풍습이 없는 不貢 비려(裨麗)부터(以) 가지런히 하기 위하여(整旅) 몸소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러 떠났다.

富山과 負山을 지나서 염수에 도달하여 그 우두머리(上)를 파하고

그 언덕에 있는 부락 6,7백 영營을 거두니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곳에서 어가(왕이 탄 수레)를 돌려(是旋駕) 도를 벗어난 자(過道)는 형벌로(弩) 응징하고 화평할 자는 도리로 대하였다.
동쪽으로 끝까지 토벌하고 성을 새로 만들기도 하고 보강하기도 하여(自城力城) 북쪽을 풍성하게 했다. 태왕이 海를 방비하고 나라 경계와 경작지와 사냥터를 두루 살펴본 뒤 되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날부터 이곳(是)의 백성(屬民)을 다스렸다.

따라서(由) 조공을 받아왔는데,

왜倭는 391년(신묘년)부터 해마다 海를 건너와 백제에게 조공을 바쳤다.

태왕이 백제(백잔)를 파하니, 백제는 倭와 연합하여 新羅로 쳐들어가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했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連侵新羅以爲臣民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 래도해. 파백잔 연침신라이위신민

4) 이로 인하여(以) 396년(영락6), 대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군사들이 먼저 공격하여 싸우지 않고 8성을 얻었다.

백잔국 도성(其國城?)의 적들이 옳음을 따르려 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려 하니

태왕의 위엄이 노여워하며, 한수(아리수=황하지류)을 건너 군사를 보내어

성을 박살내도록 명령을 내려 보내니(遣) 잔병들이 돌아가 숨어 버리고 백잔국 도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왕(아신왕)이 핍박으로 곤란을 당하게 되므로

노복 남녀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보내왔고, 왕이 스스로 돌아와 맹서(誓)하였다.

“이후부터는(從今以後) 영구히 노객으로 대왕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니

태왕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과 허물(始迷之愆)을 기록하고 이후는 정성을 다해 순종하라"고 하였고

은사(恩赦)를 베풀었다.
​이에(於是) 항복조건으로 58성을 얻고 700개 촌락과 장수들, 백잔 왕의 동생, 대신 10명을 데리고 함께 군사를 돌려 고구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얻은 성들은 다음과 같다.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여한궁리성餘韓弓利城, 이성利城, 각미성閣彌城, 모노성牟盧城 , 미사성彌沙城, 고사오성古舍烏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곤초성困草城, 잡미성雜彌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수용성古須龍城, 라성羅城, 부산성負山城, 미성味城, 가고룡나성家古龍羅城, 양성楊城, 취곡성就谷城, 우산성禹山城, 사수성沙水城, 고팔선성古八船城, 용리조성龍利朝城, 야리성也利城, 대산한성大山韓城, 순여성順如城, 수팔노성數八奴城, 보여성輔呂城, 농매성農賣城, 신성新城, 여성餘城, 백성栢城, 세성細城, 가안성佳晏城, 미류성彌流城, 소각성蘇刻城, 한미성韓美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고림성古林城, 성안성盛晏城, 안리성晏利城, 남소성南蘇城, 취추성就鄒城, 노리성奴利城, 인성忍城, 나단성那旦城, 용성容城, 윤노성閏奴城, 채창성彩滄城, 경사획성炅舍獲城 , 교성交城, 압본성鴨本城, 구부성仇夫城, 두노성豆奴城, 기국성其國城..

5) 398년(영락8), 태왕은 교칙을 내리고(敎遣) 일정 규모의 군사를 편재하여(偏師)

(옛 동족의 하나인) 숙신(帛愼)과 토욕(土谷)에서 노략질로 편하게 살려고 하는 일(因便抄得)을 못하도록 막았다.
​莫사라성(莫斯羅城)과 가태라골(加太羅谷) 남녀 3백여명이 이후에 스스로 와서 조공을 논의하였다.


6) 399년(영락9), 백잔이 대왕에게 약속한 맹서를 어기고(違誓) 왜를 끌어들여 내통하였다.

태왕이 평양 아래를 순례하였는데

신라가 급히 사신을 보내어(遣使) 태왕에게 모두 말하기를(白王云) “왜인이 국경에 가득하고 건달 깡패 자객 등 군노비(奴客)들이 성을 파괴하고 저수지(池)을 허물어 버리니 같은 동포(民)를 위하여 대왕께서 돌아와 직접 보시고(歸王) 구명해 주기를 청합니다(請命)” 하니

태왕은 가엾게 여겨 그 충성을 특별히 간직하고 파견한 사신을 돌려보내며

비밀스런 계획(密計)을 내렸다.

7) 400년(영락10) 태왕이 교서를 내려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러 가도록 칙명하였다. 남거성(男居城)부터 신라성(新羅城)까지 왜倭가 가득 차 있어,

태왕의 군사(官兵)들이 여러 방면으로 들어와 가운데로 들어가니(至) 왜적이 겁을 먹고 물러갔다.

신라군이 뒤를 밟아서 샅샅이 찾아서 잡아오고(躡踵追來) 왜의 뒤를 급히 쫓기 시작해서

임나(任那/古龍?)에 도착했다.

가라(加羅)도 고구리군의 뒤를 따르며(從) 공격했고, 성을 모두 빼앗았다(拔城).

다시 찾은 성(城卽)은 안라사람(安羅人)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戍兵), 신라성(新羅城)과 염성(鹽城)을 공격하니, 왜구는 크게 궤멸됐다.

官軍方至 倭賊退 (官兵由新羅 躡踵追來奮疾 自倭) 背急追 至古龍加羅從拔城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관군방지 왜적퇴 (관병유신라 섭종추래분질 자왜) 배급추 지고룡가라종발성성즉귀복 안라인수병 발신라성 염성 왜구대궤


※"북쪽으로는 물에 막혔고, (신라 수도)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해양무역 요충지인

임나(任那)의 가라加羅, 다라多羅, 안라安羅 지명은 현존한다.

그 근처로 주강(珠江 & 長江)이 있으니 '물에 막혔다'는 기록에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8) 되찾은 신라성과 염성 안 왜구에 대해 참혹하게 짓밟아 보복하니(城內大肆殺戮),

이성을 잃은 자들이 목숨이라도 살려 달라 애걸하였다. 관병들이 왜구(倭)를 뒤따라 패퇴시키니 9/10는 왜倭를 따라가기 거절하고 성을 지키는 병사가 되려는 안라인(安羅人)이 가득했다.

술병(戌兵)들에게 성을 다시 쌓도록(城復) 하였다.

완전히 쓸어버린 성에는(其) 숯덩이가 된 목재뿐이고 불에 타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관병들은 백잔(百殘) 군사 뒤를 추격하여 도성(其城)을 포위하니 겁을 먹은 백잔왕이 거듭 엎드려 절을 하고 사신을 보내서 5척 산호수(5尺 珊瑚樹), 이주홍보석(2朱 紅寶石) , 필상(筆狀) 하나와 함께 "전보다 배로 잘 하겠다"고 적은 글(一他)을 올렸다. 태왕은 백잔 왕자(其子勾孥)를 데려와서 키울 것이라 하고는 군사를 인솔하여 환국하였다. 되찾은 성은 안라인(安羅人)에게 지키게 했다(戌兵).
이전에는 신라왕(新羅寐錦)이 직접 와서 보고하고 조공하지 않았으나, 광개토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신라를 구해주고 안라를 빼앗아 신라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깊은 뜻에 감동 받아서 안라왕(安羅王)이 스스로 뒤따라 와 엎드려 절을 하며 노복과 공물을 바쳤다.
安羅人戌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感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救拔恩安羅王 隨自)僕勾(親來 獻物)朝貢 안라인술병 석신라매금 미유신래론사감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구발은안라왕寐錦? 수자家?) 복구請? (친래 헌물) 조공.

9) 404년(영락14), 왜가 국법을 어기고 대방 경계에 침입하여 백제군사와 내통하여 스스로 석성에 배를 정박하니 태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출발하여 정벌하게 되니... 선봉에서 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태왕을 대표하는 군사는 적의 퇴로를 끊고 막아서 좌우에서 사살하니, 왜와 도적들은 궤멸하고 참패하므로 참살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10) 407년(영락17), 태왕이 교칙을 보내(敎遣) 보병과 기병 5만으로 왜의 도적들을 쓸어 없애라 하였다. 관병들이 뒤를 추격하여 태왕의 군사는 사방으로 포위하는 작전을 썼다. 목을 베고 매질하여 참살하였다. 노획한 갑옷(鎧鉀 개갑)이 1만령이 넘었고 군비자금과 병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군사를 되돌려서 왜를 지원하던 사구성(沙溝城)을 비롯하여, 루성(婁城), 우전성(牛田城) 등 몇 개 성(□城, □□□□□□城)을 쳐서 빼앗았다.

11) 410년(영락20), 동부여는 옛날부터 이곳 추모왕의 같은 백성(屬民)이었으나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태왕이 몸소 지휘하여 토벌하러 갔다. 태왕의 군사가 부여 도성에 도착하니 부여성 입구에서부터 모두 나와서 엎드려 국빈으로 맞이하여 거듭 절하므로 태왕은 괘씸했던 지난 나쁜 일을 모두 잊고 크게 사면하고 용서하여 주었다. 넓은 태왕의 은혜에 다시 엎드려 고마워하므로 군사를 되돌렸다. ​또 태왕을 흠모하는 뜻으로 고위 관직자인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가 뒤따라 와서 이들을 데리고 왔다. 관청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복종하였다. 태왕이 도착 후 공격하여 파한 성은 64이고 촌락은 1천4백이었다.

◇압로(鴨盧)는 동부여 고위관직 이름으로 4명과 판독불가 1명, 총 5명의 압로(5加) 이름이 적혀있다.

12) 묘를 지키는 사람(守墓人) 연호(烟戶)의 수는 다음과 같다.

매구여賣句余의 민호 중에서는 국연國烟이 두 집·간연看烟이 세 집
동해매(東海賈) 중에서는 국연國烟이 세 집·간연看烟이 다섯 집
돈성(敦城)의 민호 중에서는 네 집이 모두 간연看烟
우성(于城)에서는 한 집이 간연看烟
비리성(碑利城)에서는 두 집이 국연國烟
평양성(平穰城)의 민호 중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열 집
자련(訾連)에서는 두 집이 간연看烟
배루인(俳婁人) 중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마흔 세 집
양곡(梁谷)에서는 두 집이 간연看烟
양성(梁城)에서는 두 집이 간연看烟
안부련(安夫連)에서는 스물 두 집이 간연看烟
개곡(改谷)에서는 세 집이 간연看烟
신성(新城)에서는 세 집이 간연看烟
남소성(南蘇城)에서는 한 집이 국연國烟

새로 데려온 한韓인과 예穢인의 수묘인 연호 수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한 집
모루성(牟婁城)에서는 두 집이 간연看烟
두비압잠(豆比鴨岑)의 한韓인 중에서는 다섯 집이 간연看烟
구모객두(勾牟客頭)에서는 두 집이 간연看烟
구저(求底)의 한韓인 중에서는 한 집이 간연看烟
사조성(舍蔦城)의 한韓인과 예穢인 중에서는 국연國烟이 세 집·간연看烟이 스물 두 집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에서는 한 집이 간연看烟
경고성(炅古城)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세 집
객현(客賢)의 한韓인 중에서는 한 집이 간연看烟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을 합해서 열 집이 간연看烟
파노성(巴奴城)의 한韓인 중에서는 아홉 집이 간연看烟
구모로성(臼模盧城)에서는 네 집이 간연看烟
각모로성(各模盧城)에서는 두 집이 간연看烟
모수성(牟水城)에서는 세 집이 간연看烟
간궁리성(幹弓利城)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세 집
미추성(彌鄒城)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일곱 집
야리성(也利城)에서는 세 집이 간연看烟
두노성(豆奴城)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두 집
오리성(奧利城)에서는 국연國烟이 두 집, 간연看烟이 여덟 집
수추성(須鄒城)에서는 국연國烟이 두 집·간연看烟이 다섯 집

백잔(百殘) 남쪽에 살았던 한韓인 중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다섯 집
태산한성(太山韓城)에서는 여섯 집이 간연看烟
농매성(農賣城)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일곱 집
윤노성(閏奴城)에서는 국연國烟이 두 집·간연看烟이 스물 두 집
고모루성(古牟婁城)에서는 국연國烟이 두 집·간연看烟이 여덟 집
전성(瑑城)에서는 국연國烟이 한 집·간연看烟이 여덟 집
미성(味城)에서는 여섯 집이 간연看烟
취자성(就咨城)에서는 다섯 집이 간연看烟
삼양성(彡穰城)에서는 스물 네 집이 간연看烟
산나성(散那城)에서는 한 집이 국연國烟
나단성(那旦城)에서는 한 집이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에서도 한 집이 간연看烟
어리성(於利城)에서는 여덟 집이 간연看烟
비리성(比利城)에서는 세 집이 간연看烟
세성(細城)에서도 세 집이 간연看烟

13) 광개토호태왕

(나라를 굳건하게 본래의 옛 조국강토를 찾아 회복하신 큰 임금國崗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있을 때에 교지를 내려 말했다.

"역대의 선왕들은 원근 각지에 사는 구민(舊民)들만 데려와 묘를 지키고 청소를 하게 하였으나, 나는 구민들이 점점 고달퍼져 열악하게 될까 염려스럽다. 때문에 내가 죽은 뒤 만년 후에 편안하게 나의 묘를 지키려면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정복해 데려온 한韓인과 예穢인들 만으로 묘를 지키고 술을 올리고 청소하는 일을 맡게 하여라."
​하교한 대로 한韓인과 예穢인 220집을 데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예법을 잘 알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다시 구민 110집을 데려오니, 묘를 지키는 신구의 연호를 합하면 국연國烟이 30집, 간연看烟이 300집으로 모두 330집이다.
​역대의 선왕 이래로 묘에 비석을 세우지 아니하여 수묘인 연호에 착오가 생겼는데, 광개토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好太王)에 이르러서야 역대의 선왕들을 위하여 묘에 비석을 세우고 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였다.
​또 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수묘인 제도를 법령으로 제정하여 앞으로는 수묘인들이 하는 일을 서로 고쳐서 팔아넘기는(轉賣)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비록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擅) 살 수 없다. 만일 법령을 어겨 파는 사람(賣者)은 형벌에 처할 것이요 사는 사람(買者)이 있으면 법령을 제정하여 그 자신이 수묘인이 되게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