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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 603~657) -2-

양만춘(梁/楊萬春)의 안시성(安市城) 전투

아임뉴스-우리가 언론이다. 시민 기자단! |

 

(1편에 이어서 계속)

 

11. 645년(개화4) 이세민의 침략전쟁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내용을 중심으로 이세민(당태종)의 침입과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대응을 살펴보자.

644년(개화3) 11월 이세민은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4만을 거느리고 평양(현 안평)으로 가게 하고, 방효태는 4만을 거느리고 물길로 떠나게 하였다. 또 이세적(李世勣=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6만을 거느리고 요동(현 좌권현)으로 가게 했다. 장량의 부대와 유주(幽州)에서 합류케 하였다. 이세민은 친위군 20만을 거느리고 뒤따른다.

연개소문은 건안·안시성 등 몇몇 성만 지키고 나머지는 곡식과 사료를 치우거나 불태워 적이 약탈할 것이 없게 하였다. 오골성(烏骨城)을 방어선으로 삼고 용맹한 장수와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였다.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는 별도로 은밀한 계책을 내렸다.
“당나라 군은 군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말·양을 많이 가져왔으나 겨울에 무엇으로 짐승들을 먹이겠소? 그러니 속전속결로 나와 안시성을 먼저 칠 것이오. 양공(양만춘장군)은 성을 지키다가 저들이 굶주릴 때 공격을 개시하고 추공(추정국장군)은 밖에서 공격하면 되오. 나는 뒤에서 당나라의 후미를 습격하여 퇴로를 끊고 이세민을 사로잡을 것이오.”

645년(개화4) 3월 이세민(태종)은 정주를 출발하여 5월에 요택에 이르니 2백 리(80km)나 되는 진흙길이 펼쳐졌다. 목석을 날라 길을 만드는데 수나라 장병들의 해골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세민(태종)은 제문을 지어 곡하고 신하들에게, “오늘날 중화의 자제들이 거의 다 이 해골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요수(遼水)를 건넌 뒤, 선비족 최초로 요동성(遼東城)을 뺏는다. 이름을 '요주(遼州)'라 고쳐 불렀다.

 

요동성과 마찬가지로 태행산맥 선상에 있는 백암·개평·횡악·은산·황성도 함락한다. 이세민(태종)은 이세적 등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작전을 다시 의논했다. 강하(江夏)왕 이도종(이세민 6촌친척)은 오골성(烏骨城 오골성주 추정국)을 뺏고 곧바로 평양을 치자고 했고, 이세적과 장손무기는 안시성부터 치자고 하였다. 이세민(태종)은 일찍이 양광(수양제)이 우문술에게 30만 대군으로 평양을 치게 했다가 전군이 몰살당한 일을 잘 알았으므로 이세적의 말에 따라 안시성(安市城 안시성주 양만춘)부터 공격하였다.​​​​​​​


12. 양만춘(梁/楊萬春)의 안시성(安市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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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주 양만춘(安市城主 梁/楊萬春)이 지키는 안시성(安市城)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었는데, 성첩을 더 쌓고 정예병을 배치하였으며 수십만 석의 양곡을 비축해 두었다.

6월에 이세민(당태종)이 이세적 등 수십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였다. 북부군 총사령관(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총사령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우리 고구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에 합류하러 향했다.​​​​​​​


안시성 동남쪽 8리(3.2km) 주필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는데, 이때 일개 병사인 용문인(龍門人)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의복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진영에 깊숙이 들어가 고구리군을 풀잎처럼 쓰러뜨리자, 이세민이 이를 높이 여겨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러나 고연수 장군은 영리하게 몇달간 지구전을 펼쳤고, 당군은 여러 달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하지 못하니 식량이 점차 바닥나기 시작하였다. 해상의 전함들도 죄다 격파되어 식량을 운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날씨가 쌀쌀해지므로 풀이 마르면 소·말·양떼가 아사할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낭패를 당한 이세민(당태종)은 성 동남쪽에 흙산을 쌓게 하였다. 2개월에 걸쳐 50만의 인력이 투입되는 동안에도 줄기차게 성을 공격하였으나 사상자만 늘어갔다. 흙산이 완성되니 산 위에서 투석기(礮石 돌쏘는 무기)를 쏘고 충거(성벽, 성문에 부딪히는 용도)를 써서 성벽을 훼손하였다. 안시성에서는 무너진 곳에 목책을 세웠으나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양만춘은 결사대 100명을 뽑아 성벽이 무너진 틈으로 나가 당군을 공격하도록 하여 토산을 빼앗고 산 위의 포석기와 충거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도리어 고구리가 산 아래의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되니 계책이 궁해진 이세민(당태종)은 회군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요동 지역을 양만춘 장군(안시성주)과 추정국 장군(오골성주)에게 맡긴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정병 3만명으로 적봉진으로 향해 남진하여 상곡을 기습하였다. 이에 긴급을 알리는 봉화가 오르니 하룻 밤에 안시성에 전달되고 이세민(당태종)은 곧바로 회군을 준비하였다. 봉화를 본 추정국 장군은 오골성의 전군을 동원하여 안시성 동남쪽의 협곡으로 몰래 진군하여 기습을 단행하고, 양만춘 장군은 성을 나와 공격을 퍼부었다.

당나라의 진영은 대혼란에 빠져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고 달아나는 지경이 되었다. 이세민(당태종)은 헌우락에 이르러 말발굽이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왼쪽 눈마저 양만춘(梁/楊萬春)의 화살에 맞아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세민이 생포될 위기에 처했는데, 때마침 용장 설인귀가 달려와 그를 구하고, 전군 선봉장 유홍기는 추격군을 가로막고 혈전을 벌였다.

이때 양만춘(梁/楊萬春)은 이세민(당태종)을 쫓아 요수에 이르러 수많은 당나라 장수를 베고 사로잡았다. 요택에 이르니 이세민(당태종)은 말들을 진흙 밭에 눕히고 다리로 삼아 건너고 있었다.

10월에 임유관 남쪽의 연개소문은 당나라군의 퇴로를 끊고 북쪽의 양만춘(梁/楊萬春)은 추격을 계속하였다. 이세민(당태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때마침 눈보라가 크게 몰아쳐 천지가 아득해지고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워, 양쪽의 군마가 엎어지고 뒤엉키는 혼란을 틈타 이세민(당태종)은 간신히 도망하였다.

고구리-당 간 전쟁의 혼란을 틈타, 백제가 몰래 신라의 성 7개를 뺏는다.

13. 장안長安 약정

당나라 군대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이수(역수易水)를 건넜다. 이때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통도성(桶道城 지금의 고리진高麗鎭)을 고쳐 쌓게 한다. 또 군사를 여럿으로 나누어서 하나는 요동성(현 좌권현)을 지키게 하고, 또 하나는 상곡(上谷 좌권현 바로 위)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세민世民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했다.

막리지莫離支는 추정국定國, 양만춘萬春 등의 수만 기병을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長安에 입성했다.

장안長安에서 이세민과 약정을 맺어 산서山西, 하북河北, 산동山東, 강좌江左가 모조리 고구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리는 백제와 더불어 함께 요서의 땅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요서遼西 땅에 백제령으로 진평晋平2군이 있고, 강남(양자강 아래)에 월주越州가 있었다(속현: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

10월, 패장 이세민은 탄식하며 “만일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전쟁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라의 제후국이며 용병국인 당이 처절하게 깨지고 나서, 고구리와 신라 간 천자국 자리를 두고 벌이는 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645년(개화4) 고당高唐전쟁에서 승리한 고구리는 산서성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한다. 고구리가 대승을 거둔 바, 전쟁 중에 잃었던 현토·횡산(橫山)·개모·마미(磨米)·요동·백암·비사·협곡(夾谷)·은산(銀山)·후황(後黃)의 10성은 고구리가 되찾은 것으로 본다(기록은 왜곡되어 있음). 특히 광개토호태왕, 장수호태왕 때 점령한 임둔 지역(신성)도 회복한다. 654년(개화13) 보장태왕이 안고 장군으로 하여금 고구리+말갈 병사를 이끌고 거란을 공격케 하는데, 임둔 지역 신성에서 맞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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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 평한 이 전쟁의 성격

안시성 전투는 한·중 두 민족의 운명이 걸린 대전투로 고대 동양 역사상 큰 전쟁이었다. 군대 규모는 수나라 때에 미치지 않지만 양쪽 전략의 치밀함이나 군대의 훈련이나 물자의 규모로 보면 살수 전투를 능가한다. 전투 기간도 그 때보다 갑절이었다. 이 전투는 두 민족의 운명을 좌우한 대전투였다. 그런데도 『당서』, 그리고 중화 사서를 따라 쓴 『삼국사기』의 기록은 사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구체적인 5개의 잘못된 사례 나열)

① 15만 고구리 고연수 군이 지구전 전략으로 승리한 것에 대해 '패배(항복)'로 바꿔치기

② 이세민(당태종)이 양만춘(梁/楊萬春)의 화살에 눈을 맞은 것에 대해 『삼국사기』에서 안시성주가 누군지 전하지 않는다고 쓴 것.. 조선 연산군때 학자 이맥(李陌 1455~1528)이 지은 역사서 『태백일사』, 그리고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정관음貞觀吟」과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 노가재 김창흡의 「천산시」 등 많은 역사서와 문헌에서 언급된다. 이세민(당태종)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겨준 그를 드러내어 영웅으로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가 중화 사서를 따라 쓴 탓인지, 아니면 조선시대 '사대모화'를 국시로 삼았던 사가들이 개작하면서 그렇게 고쳐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③ 이세민(당태종)은 귀국 후 4년만에 병으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그 병이 내종이라거나 감기·이질 등으로 제각기 다르다. 시대를 풍미한 전쟁광 이세민(당태종)의 사망 원인을 분간할 수 없도록 모호하게 기록한 것은, 고구리 장군 양만춘의 (독)화살에 맞아 죽은 치욕을 숨기기 위한 것.. 그러나 '이세민의 병이 요동에서 생긴 점'에서는 모든 기록이 한결같다. 송 2대 조경(趙炅 태종 976~997)이 태원에서 독화살에 맞아 입은 부상이 매년 재발하다가 3년 만에 죽은 사실을 『송사』가 숨긴 것과 같다 (진정의 『양산묵담』에 나옴).​​​​​​​


15. 이세민 진격루트

당시의 전쟁루트는 많은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물줄기를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많은 배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무협(巫峽)→강주(江州)·양주(楊州)→내주(萊州)로 물길을 따라 사신단을 보냈다. 장강을 타고 가는 그 길이 바로 신라영토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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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를 해석할 때 '海'를 '바다'로 해석하는 건 '무지의 소치'다. '海'는 늘 '황하' 혹은 '물(호수나 물길)'을 뜻한다.​​​​​​​


16. 연무대(演武台), 고리영(高麗營), 몽롱보탑(夢窿寶塔)

연개소문이 비도를 연습한 곳(연무대演武台), 연개소문이 군사연습을 한 곳(고리영高麗營)이 고구리 마지막 수도 평양!! 이세민이 신라와 연합세력을 이루고자 이세민이 '무협'에서 보낸 사신이 거쳐간 곳 '강주江州·양주楊州→내주萊州' 물길,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내려간 곳 강소성 염성(盐城) 몽롱보탑(夢窿寶塔), 다 어디인가?

이처럼 지나한족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역사이지만 위와 같은 고구리말기 유적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나름 보존하고 있다. 떠먹여줘도 못 알아먹는 한국사학계가 문제라는 얘기다. 이게 다 국보인 정통사서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기록이다.​​​​​​​


17. 중화의 춘추필법 & 역사왜곡

1)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황하에서 펼쳐진 해전 포함)

396년(영락6) 백제 정벌, 407년(영락17) 후연(燕) 정벌 때 광개토호태왕은 수군을 활용하여 굴복시켰고, 612년(홍무23) 2차 고수高隋 전쟁 때 고건무(훗날 영류태왕)는 수군으로 패강에서 래호아의 수나라 수군을 몰살시켰다. 게다가 보장태왕 때 고구리는 신라와 당의 교역을 방해했는데 이는 강력한 수군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중화의 역사가들에 의해 가려지고 숨겨졌지만, 396년, 407년, 612년과 마찬가지로 645년 이 거대한 패권전쟁은 모두 대륙에서 이루어졌으며, 황하와 그 지류에서 수만 수군이 해전을 벌였다.

'사대모화'를 국시로 한 탓에 조선시대 사가들의 붓장난에 의해 많은 기록들이 멸실됐지만, 그래도 모든 기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신라의 본토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현지 유적들과 증언이 남아있다.

2) 643~645년 당을 쳐 발라버린 '연개소문'에 대해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음 (필자는 『삼국사기』를 개작할 때 조선 사가들이 붓장난을 친 걸로 봄)

연개소문은 당시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이세민(당태종)의 침략을 여지없이 물리쳐 패주하게 만들었으니, 을지문덕 장군이 양광(수양제)의 침략을 물리친 것과 그 공이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삼국사기』에서는 이세민(당태종)과 같은 입장에서 전쟁을 기록하면서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지도 않았다.

3) 왜곡된 기록

① 뇌물로 퇴로 안전을 도모하려 한 이세민

645년(개화4) "이세민은 (양만춘이)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기고, 비단 100필을 주어 군주를 섬긴 것을 격려하였다"

임진왜란 때 진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이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 1543~1607)에게 뇌물을 줘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만 그것을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차단해버려서 노량 해전으로 이어진 것에서 보듯, '안전한 퇴각'을 위해서 뇌물을 줬다고 봐야 상식에 부합한다. 이런 비겁끝판 뇌물왕 이세민을 마치 '패했지만 적장에게 선물을 주는 멋진 모습'으로 부각하는 한국사학계, 참으로 한심하다.​​​​​​​


② 646년(개화5) 5월 "보장태왕과 연개소문(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두 명을 바쳤다. 이세민이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자에게'미색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게 하는 것이 가여우므로 나는 받지 않겠다'라 하였다."

연개소문은 당시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이세민의 10만이 넘는 침략군을 여지없이 물리쳐 패주하게 만들었는데,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미녀를 바쳤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헛소리인가? (조선시대 <삼국사기> 개작을 하면서 이렇게 왜곡한 것으로 보임)

③ 646년(개화5) 5월 "이세민(당태종)이 작년에 군사를 돌이킬 때 활쏘기용 옷(弓服)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는데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 비록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보내도 그 말이 모두 궤변이었고 당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도 거만하였다."

이세민(당태종)이 활쏘기용 옷(弓服)을 주었다? 만약 받았다고 치면 나라를 침략한 원수에게 허리 굽혀 사례라도 했어야 한다는 뜻인가? 또 "연개소문의 말이 궤변이다"라는 말은 당나라가 기뻐할 표현이니, 말문이 막힌다.

이러한 (중화에 대한 '사대'에 빠져 자국의 기록을 왜곡하는) 사대주의 역사가들에 대해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비판하였다.

"노예적인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좁쌀과 팥알처럼 작은 자기 눈알에 보이는 대로 연개소문을 수백 년간 혹평해 왔다. 그들은“신하는 충성으로써 군주를 섬겨야 한다”는 불완전한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탄핵하고, “대국을 섬기는 소국은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노예적 심리로 그의 공적을 부인하였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 인물의 시체를 한 점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버린 것에 대해 나는 통탄한다.

중화는 이른바 '춘추필법'이라 해서, 자국의 불리한 역사는 기술하지 않는다. 고구리와 후한의 대전쟁인 좌원 대첩 역시 기록하지 않은 그들이 과연 자신들의 영웅 이세민(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긴 내용을 어찌 기록에 남기겠는가?"

※고구리는 172년(신태왕8), 184년(고국천태왕6) 두 차례의 좌원 대첩으로 한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바 있다.

18. 이세민 침략전쟁 그 후..

이세민은 눈알에 화살을 맞은 부상 후유증으로 "다시는 고구리를 치지 마라" 유언을 남기고 4년만인 649년(개화8) 죽는다.

657년(개화16) 생전에 당나라와 벌인 모든 전투에서 승전했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형제는 물과 같이 사랑하라. 화살은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쉬이 부러진다. 부디 이 아비가 죽어가며 하는 말을 잊어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665년(개화24) 사망설도 있음

맏아들 연남생도 662년(개화21) 대당전쟁 승리 등 고구리의 명성을 이어가지만, 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당나라에 투항해서 당군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668년(개화28) 평양성을 치면서 고구리 멸망의 주역이 되고 만다.